캔디, 마리아, 사이모린
김사월 - 누군가에게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네가 사랑받기에 결국 이해 못한대도 넌 아름답지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완벽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좋아해, 라는 말에 인색하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건 어떤 조각이 되어서 ‘나’에게 달라붙는다. 그럼에도 꺼내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좋아했었다’는 과거를 넘어 ‘사랑하고 있다’의 칸에 넣어둔 것들. 나를 잃지 않을 수 있게 녹아들어서 영양분이 된 글자들이다.
왜 사랑하는지 되짚어보며 지난날 빠졌던 영웅들을 돌아봤다. 좋아하는 것들은 그냥 좋다. 많이 좋아할수록 ‘왜’가 힘들다. 본디 사랑엔 이유가 없다. 스포이드처럼 뽑아낼 순 없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게 이런 거였지 알기 위해 이야기들을 뒤적여보기로 했다. 사랑했던 것들을 더 희미해지기 전에 곁으로 당겨오고 싶었다.
‘좋아함’의 기준이 된 이야기 속 친구들이자 영웅을 세 명 뽑았다. 너무 좋아해서 선뜻 쓰기 어려웠지만, 동심이 낡아서 파사삭 흔적도 없어지기 전에 시작했다. 끝 실을 잡고 기억을 감아올린다.
when I was 14
<캔디캔디>의 캔디
당신들이 뭘 알아! 캔디는 그런 애가 아니다. 민폐나 끼치고, 싸우는 남자 뒤에서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리는 그런 애가 아니다. 시골에 와서 처음 친해진 길고양이의 이름은 얼룩이다. 몇 해 전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지만, 여러 길고양이를 겪고 난 지금도, 얼룩이만한 애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게 된다. 스트릿 출신인데도 예의가 있었다. 눈치를 알고 선을 지키며 다정했다. 캔디도 그렇다.
영웅의 탄생엔 시련과 극복이 존재한다. 이야기 밖의 나도 주저앉고 싶은 어려움들을 캔디는 이겨낸다. 가볍게도 얼렁뚱땅도 아니고, 온 마음을 다해 말이다. 그 강인함은 주변 인물들도 성장시킨다. 자기 연민에 빠진 테리우스도, 사실은 좀 찌질한 앤소니도. 출신을 부끄러워했던 애니도. 주어진 상황을 이겨내고, 보상을 받은 후엔 기꺼이 누리고 감사해한다. 근데 당연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떠나야 할 땐 다 두고, 미련 없이 단호하게 걸어간다. ‘캔디형 주인공’의 원조인 캔디캔디는 온 마음을 다하는 성장일기이다.
고유명사가 된 ‘캔디’의 원작을 읽어본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마스카라 포장지처럼 복고 스타일이 되어서 촌스러워 보이는 일러스트가 진입장벽일 수 있지만, 읽다 보면 테리우스 잘생겨서 미쳐버린다. 뒤집어 읽어야 하는 흑백판을 추천하는 이유는, 캔디의 노란 머리에 감긴 비단 초록 리본 같은 걸 상상하며 보는 편이 더 생생하기 때문이다. 컬러판도 있지만 정주행 할 땐 흑백으로 보게 된다. 총 5권이고, 미친 속도감을 자랑하니 1편부터 입이 벌어지리라 장담한다. 반전 지점이 두 개 있는데, 이미 비련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앤소니에 대해 스포 하자면, 앤소니는 1권에서 죽는다. 그리고 남은 반전 결말은 비밀로. 처음 읽었을 땐 나도 소리를 질렀다. 결말에 대한 촘촘한 복선까지 있어서 대충 종이를 넘길 수 없다.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고난을 관통하고, 의지할 곳이 갖춰진 다음에도, 캔디는 또 떠난다. 눈 내리는 거리에 서있는 캔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미어지며 주먹을 꼭 쥐는 응원을 하게 된다.
when I was 12
<작은 백마>의 마리아
동화 같은 분위기를 동경한다.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원한다는 걸 인정한지는 얼마 안 됐지만 여전히 그렇다. 이런 취향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책을 쫙 펴서 읽지 않을 정도로 아끼는데, 너무 많이 봐서 모서리들이 터졌다. 해리포터에 한참 빠져 언저리 책들을 탐구할 시절에, 조앤 롤링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해서 읽게 됐다.
시작의 열 페이지 정도를 두 인물과 한 강아지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할애한다. 잘 세공된 장면들이 섬세한 묘사로 펼쳐진다. 이미 이 이야기를 좋아할 준비가 끝난다. 시작 부분을 읽을 때면 언제나 시곗바늘을 돌려 처음 펴 들고 두근거리던 시간으로 보내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크리스탈 구슬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가 입고 있는 회색 비단 원피스와 소매 가장자리에 하얀 양털을 두른 따듯한 회색 모직 외투가 발목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크리스탈 구슬이 그 자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은빛 나무에서 뻗어 나온 은빛 가지와 줄기들은 너무나 가늘고 섬세해서,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빛이 마치 체에 친 은빛 먼지 같았다.
실버리듀 마을의 문에이커 저택, 헬리오트로프, 러브데이 미네뜨... 이국적인 지명과 (제라늄이라는 꽃도 여기서 처음 알았다) 단어들의 식감만으로도 초딩인 나는 침을 줄줄 흘렸다. 시작 부분과 더불어 또 좋아하는 곳은 마리아가 처음 자신의 방에 들어서는 장면으로, 방을 묘사하는 데에만 4페이지가 나온다. 탑의 꼭대기에 있어 둥근 모양이고, 천장엔 별과 달이 새겨져 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 터키 젤리를 먹어보고 싶었던 것처럼, 마리아의 방에 있다는 설탕이 묻은 과자가 너무 궁금했었다. 다른 음식 묘사도 얼마나 성실하게 설명했는지, 읽고 나면 이미 한 상 대접받은 것 같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 책의 신비로운 분위기는 직접 떠먹어봐야 안다. 일상적인 내용들에 슬며시 끼어둔 판타지 요소들은 어디까지가 실제 내용인지 헷갈리게 한다. 이 주제로 졸전 작품도 치러서 미련이 없다.
1983년에 처음 나온 이야기고, 워낙 예전의 책이라 진정한 숙녀라면 어때야 한다, 화내는 로빈의 모습이 짜증 나는 등 어릴 땐 보이지 않았던 부분도 간혹 나오지만, 똑똑하고 어려움을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는 마리아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추천한다. 영국에서는 침대 맡에서 아이에게 읽어주는 이야기라고 한다. 의문 두 가지, 잠들기 전에 읽기엔 두 권의 책으로 이야기가 길고, 좀 으스스한 부분도 있다.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하니, 찌든 일상이 지겨울 때 읽어보시길.
when I was 11
<사이모린 스토리>의 사이모린
사이모린은 키가 크고 검술을 좋아한다. 결혼을 앞두고, 사이모린은 성에서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부츠를 신고 자신의 용을 찾아 린더윌 왕국을 떠난다. 보통의 공주라는 틀을 깨며 운명을 개척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다른 동화들을 패러디하기도 해서, 잔잔한 웃음과 함께 볼 수 있다.
그러자 요정 할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럼 도대체 문제가 뭐야?”
사이모린이 궁전 전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바로 이거요! 자수 수업, 춤 수업, 그리고, 내가 공주라는 거요!”
크면서 때가 될 때마다 물려주려고 책장 정리를 하곤 했는데, 사이모린은 남겨둬서 2004년에 만난 그 책이 그대로 있다. 총 4권의 시리즈고, 아쉽게도 절판된 듯하다. 해리포터도 마법사의 돌만 삼사십 번 읽은 취향을 반영해서, 모험이 펼쳐지는 첫 번째 권이 가장 재미있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책으로만 친한 친구가 있었다. 은근히 까다로운 성미였는데, 이 책을 추천해주고 인정받아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오랜 시간 장래 희망란에 사서를 쓰게 한 책이다.
“졸업한 지 3년이 지났고, 모두들 여전히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기만 기다리고 있다오. 같은 반 친구들은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소. 조지는 곧바로 용과 싸워 이기기 시작했고, 아서는 고향에 가자마자 바위에서 마법의 칼을 뽑았소. 별 볼일 없던 친구들까지도 뭐든 해 내지 않겠소. 잭은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콩 농사를 지을 생각밖에 없었는데, 결국 마술 하프를 훔치고 거인을 죽이기까지 했지 뭐요. 나만 한 일이 하나도 없소.”
다시 읽어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많다. 어른이라면, 이런 책 하나쯤은 아이들을 위해 남겨야 한단 생각까지 든다.
모험을 찾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이모린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와 비슷하다. 사이모린은 용의 마을로, 소피는 하울의 성으로 직접 걸어 들어간다. 눈치를 보다가도 얼토당토않은 용감함을 발휘한다.
달의 공주 마리아는 ‘물의 여왕’의 메를레와 주니파, ‘잠옷을 입으렴’의 둘녕과 수안과 비슷하다. 어쩐지 초연하고 가녀리지만, 어른인 내가 안김 받아야 할 것 같다. 부엉이 솔로몬과 하늘을 나는 ‘사라’, ‘비밀의 화원’의 메리도 마찬가지다.
캔디는 ‘헝거 게임’의 ‘캣니스’가 떠오른다. 덮을 수 없는 몰입감까지 비슷하다. 영화는 남주인공 얼굴이 책에서 설명한 모습과 달라서 큰 실망과 슬픔에 빠져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헝거 게임은 꼭 책을 추천한다.
나도 함께 자랐듯, 어린 친구들이 이 책들을 봤으면 한다. 어느 히어로 무비보다 멋진 영웅들이니까. 이 주인공들을 만나보고 좋아한다면, 나는 이미 당신을 좋아한다.
<사이모린 스토리(총 4권)>
<작은 백마(총 2권)>
<캔디캔디(총 5권)>
<하울의 움직이는 성(1편)>
<물의 여왕(총 2권)>
<잠옷을 입으렴>
<사라(총 3권)>
<비밀의 화원>
<헝거게임(총 3권)>
<마틸다>
<클로디아의 비밀>
<그린 게이블즈의 빨간 머리 앤(총 10권)> (https://brunch.co.kr/@chocowasun/17)
모두 멋진 여자 주인공들이 나오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