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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May 23. 2019

5월에 피는 흰 꽃

오타루/비에이/삿포로 여행기

라이카 미니와 캐논 30D, 그리고 목감기와 함께한 여행.

평화롭고 많이 웃었던 5월의 삿포로입니다. 

조금의 식물 이야기도 곁들였어요.






오타루




오타루는 반짝이고 작은 것들이 많은 곳이다. 같은 길을 여러 번 걸어 다녀서 다시 가도 골목을 외울 수 있다. 성안길을 끝에서 끝까지 왔다 갔다 하는 기분과 비슷했다. 어묵과 소주잔을 샀다. 


비몽사몽 한 상태여서 캐논 카메라로 찍은 건 세팅이 맞지 않았다. 멍텅구리 한 사진만 점점점. 그리고 날이 많이 밝아서 거의 날렸다. 대신 필름은 그리고 싶은 그림처럼 잘 나와주었다. 


여기서부턴 라이카 미니, 후지 200. 일본은 뭔가 후지인 느낌이라 챙겼다. 오타루 거리의 모습들. 

연못에는 소원과 동전이 가득하다. 오타루의 오르골처럼 빛난다. 사람들은 어느 물에다 조차 소원을 빈다. 
튀김을 하나씩 구워주던 작은 가게. 아저씨가 하루 종일 기름 냄새 맡을 게 걱정됐다. 별걱정?

튤립이 많았다. 너무 추운 삿포로의 날씨 덕에 하우스에서 겨울 간 키워 나온 식물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튤립은 구근 식물이라 월동을 한 걸까? 옮겨 심었을 것 같은데 궁금했다. 우리 동네는 반반이다. 작약은 겨우내 벌어서 주렁주렁 꽃이 피었다. 칸나가 많이 심긴 앞집은 가을이면 칸나를 다 베고 캐서 구근을 신문지에 싸서 보관한다. 그리고 봄에 다시 심는다. 힘드신지 올해는 안 심으셨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여기 가서도 식물 사정이 궁금하다. 



햇살이 좋으니 이렇게 선명하게 나온다.
귀여워!





<5월에 피는 흰 꽃>

여기에도 흰 꽃. 



삿포로의 5월에서 흰색을 찾자면, 자욱한 고기 연기 사이로 두 그루 남은 벚꽃 나무와 오타루 가로수였던 산딸나무. 그리고 꽃은 아니지만, 만년설이 아니라 아직 녹지 않은 겨울 산. 


삿포로보다 아래쪽인 우리 동네를 떠올린다. 5월이 되면 논에 물을 대고 과수원이 바쁘다. 추위가 가심과 동시에 부랴부랴 피던 봄 꽃들과 다르게 한 숨 고르고 피는 꽃들이 많다. 조심스럽고 얼굴이 크고 하얀 애들. 


흰 나무들도 많다. 산을 하얗게 물들이는 아카시아. 바람에 그 향기가 배어 있어서 문을 열 때마다 킁킁거린다. 또 이팝나무와 여기에도 가로수로 심긴 산딸나무가 있다. 이팝나무는 얇은 리본, 산딸나무는 예쁘게 묶어놓은 리본 같다. 질 때도 예쁜 불두화, 초롱꽃 같은 때죽나무도 있다.


풀로는 샤스타데이지, 흰 고들빼기, 흰 좀씀바귀가 마당에서도 잘 자란다. 삿포로에도 많던 토끼풀도 하얗고, 그중 향기로 최고는 노지 딸기다. 딸기 꽃이 피면 달큼한 향기에 같은 길을 자꾸 되짚게 된다. 맡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죽기 전에 맡아야 될 향기 100 이런 게 있다면, 하우스 밖에서 풀들과 섞여 피는 노지 딸기 향기를 꼭 꼽을 테다. 향기는 덜 공격적이지만 못지않게 은은한 찔레꽃도 있다. 올해에는 새삼스레 찔레꽃을 보며 군침을 흘린다. 아카시아와 비슷한 시기에 피는데, 늘어진 아카시아 가지 밑에 점점이 박힌 찔레꽃을 보면 막 잘 살고 있는 확신이 차오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으로 찍어두려 한다. 


아카시아가 아이보리 색이 돈다면 찔레꽃은 가시 돋친 덩굴 사이에 뿌려진 티타늄 화이트. 선명한 별처럼,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찔레꽃은 빛이 없어도 빛나는 달이다. 찔레꽃 울타리라는 동화책이 있다. 덩굴 안에 작은 생쥐들(고양이가 물어오면 소리 지르는 진짜 생쥐 말고 그림 속의 귀여운 생쥐)이 놀고 있을 것만 같다. 제비꽃과 찔레꽃이 좋은 스물일곱의 5월. 음, 잘 살고 있군. 짧은 여행, 안 봐도 훤한 집 앞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때죽나무와 노지딸기. 사진은 지금은 망가진 니콘 필름카메라.


마당에 핀 샤스타데이지와 산책길의 아카시아. 사진은 캐논 30D.  
이팝나무와 산딸나무. 얇은 리본과 묶어놓은 리본같다. 사진은 다음 백과 우리 나무의 세계.
부처님 머리와 수국을 닮은 불두화, 찔레꽃 무리. 사진은 다음 백과 우리 나무의 세계.



다시 오타루

여기까지가 라이카 미니, 

이 밑으로는 다시 디지털카메라.



오타루의 오르골당
이것만 필름 카메라. 어두운 내부 조명. 좋은데 계속 있으니 숨이 막혔다. 내 방도 이런데, 이래서 아빠가 맨날 조명 바꾸라고 하는 건가?
작은 사람이 작은 물건을 만지작거린다.
지나가다 마주친 카페. 




비에이


뭔가 부랴부랴 예약한 비에이 투어. 버스에 두세 시간 실려서 가는 건데,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와서 평창 보러 가는 투어 한 느낌? 기대가 없어서 좋았다. 일본에 가장 많은 점포가 있는 업종은 무엇일까요, 힌트! 서비스 업입니다. 가이드 아저씨가 낸 퀴즈 맞췄다. 혹시 투어 가실 분, 정답은 부동산이에요. 미용실, 치과, 편의점... 오답도 부자. 피곤했는지 돌아오는 버스에서 노을을 마실 듯 입 벌리고 자서 콧등이 따끔거렸다.  


여기부터 다시 필름 카메라. 

양귀비, 튤립, 무스카리. 여기는 민들레도 얼굴이 크다. 춥디 추운 겨울을 독하게 나서 그런가 싶다.
투어 버스 타러 가는 아침. 한강과 뭐가 다르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게이트볼을 하고 계셨다. 
이건 디지털카메라.
사람이 더 없는 비에이. 마을이 레고 같다. 트루먼 쇼 세트장??

물이 좋아 쌀이 맛있기로 유명한 삿포로. 무거워도 쌀을 꾸역꾸역 샀다. 갓 지었을 때보다 식은 후가 더 찰기가 돌고 맛있다. 우리 동네 쌀도 맛있다 뭐. 아는 아저씨가 아빠 가게에서 돈 대신 쌀을 낸다. 햇반 만드는 쌀이라던데 길고 윤기가 도는 게 비슷하다. 일본은 쌀을 지역에서 매입해 판매를 관리하기 때문에 농업 종사자들의 경제가 안정적인 편이라고 한다. 쌀도 초밥용 쌀, 카레용 쌀 구분해서 개발한다고 한다. 


시골 와서 사니 더 느끼는 게, 농사가 참 돈이 안 된다. 키우는 건 힘들어도 팔 땐 몇 백 원이다. 포장한 비닐값이라도 나올까 싶을 때가 대부분이다. 막 찾아보고 지원받고 하는 것도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나 한다. 논농사는 5월부터 늦어도 10월이면 끝나니, 꿀이라고 마당 물로 다 채우자고 농담처럼 말해도, 농사를 업으로 삼기엔 위험이 크다. 개발과 정책이 좀 더 촘촘하고 체계적이어서 지원금만 쏙 빼먹는 사람들 말고 진짜 농사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흰 산, 흰 꽃, 흰 나무...

흰 눈사람! 같이 간 친구랑 닮았다. 



같은 소품을 찍은 것. 위에 디지털, 밑이 필름. 햇살만 충분하다면 필름의 맛이 좋다. 






삿포로 시내



시내라는 말도 지방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서울은 다 시내니까. 인구의 대부분이 모여있다는 삿포로 시내에는 퇴폐업소가 참 많았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 뒤로 메뉴판처럼 걸린 여자들의 사진. 골목이 아니고 대로변이었다. 


그리고 레몬 사와를 찾아 헤맨 날. 결국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전 가게에서 애매한 차별을 받고 거절당한 터라, 한이 맺힌 레몬 사와를 두 잔씩 때렸다. 그리고 매일 밤 숙소에 와서 맥주를 마셨다.  

해 질 녘에도, 어두운 밤에도 반셔터를 여러 번 누르면 자동 필름 카메라로도 이렇게 나온다. 
책이 아니라 카레예요. 




그림 그리러 오는 애기들 생각에 꼬질한 사탕을 몇 개 사 왔다. 별로 관심 없는 척하면서 엄청 좋아한다. 다시 일상의 사이클로 돌아온 나는 천천히 하루들을 돌린다. 오늘도 목요일이라 역시 도서관을 다녀오고, 오후엔 그림을 그린다. 그 사이에 일상이 아닌 시간들을 되짚어보니, 저린 다리와 여행 내내 괴로웠던 목감기가 곁에 느껴진다. 감기도 그때의 기분도 희미하지만 이렇게나마 부스러기들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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