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더블린 Gay Thertre Festival, IDGTF
아일랜드에 오면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LGBT 관련 행사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곳인데다 누군가의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으로 차별받지 않는 국가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최초로 동성 결혼 법제화를 국민 투표에 붙인 나라다. 투표율은 찬성 62%, 반대 38%로 동성혼을 합법화했다. 누군가의 삶의 결정권을 국민 투표에 부쳤다는 점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과반수를 훌쩍 넘겼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한국은 아무리 인식 수준이 바뀌고 있다고 해도 동성혼을 국민 투표에 부쳤을 때 부결될 것 같다. 대통령부터 후보 시절에 표심을 우려해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반대하지요'라고 하는 국가인데.
더블린 시내만 봐도 여섯 색깔 무지개 깃발을 걸어둔 곳이 많고 유명한 게이 클럽 The George는 36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클럽 조지가 있는 거리 이름도 George Street이다. 스트릿 이름이 먼저인지, 클럽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아일랜드는 카톨릭 국가로 상당히 보수적이다. 지난 수년 동안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걸리면 법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시골로 들어가면 편견을 갖고 있는 시선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단 비인권적이고 헌법에 위배되는 조항을 삭제하고 동시에 동성혼까지 합법화한 국가로 변모한 것은, 가부장제와 유교+기독교가 섞힌 배척적 문화를 가진 한국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지난 4월 막 더블린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때 우연히 5월 초~중순에 진행하는 LGBT 행사를 발견했다. 바로 International Dublin Gay Theatre Festival(IDGTF).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게이연극제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Theatre, Drama 등 연극제 자체가 영화제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고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거기다가 '게이' 연극제라니 찾기 더 힘들 것 같다.
누구든 봉사활동에 지원하길 바란다는 문구를 보고 냉큼 지원을 했고 벌써 페스티벌 첫 번째 주가 지났다.
이번 행사는 5월 6일부터 19일까지 더블린 시내 중심부에 있는 4곳의 극장에서 진행된다. 연극제가 시작하기 며칠 전 나는 연극제 초창기 멤버인 Garath와 함께 Temple Bar와 Dame Street 근방에 있는 식당, 카페 등에 팜플렛을 비치했다. 그날은 아주 화창한 토요일이었는데 여름처럼 더웠다. 처음에는 가게 사람들이 안 좋아하면 어쩌려나, 거절하면 어쩌려나 걱정이 많았는데 시도해보니 웬걸 다들 흔쾌히 받아줬다. 보니까 각종 행사 팜플렛이 많이 비치돼 있어서 흔한 일인 거 같긴 한데 행사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도 여럿 만나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봉사활동 주요 내용은 본인이 배치된 극장에서 온라인 예매를 한 관객들에게 표를 바꿔주거나 현장 예매를 도와주거나 입장 티켓을 받고 연극 시작 직전에 짧은 안내 사항을 전달하는 것 등이다. 상당히 할 일이 없다. 1시간 전에 와달라고 했는데 화장실 위치만 제대로 확인하면 그렇게 일찍 갈 일은 없다. 나는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예매 일을 맡기질 않더라. 나는 주로 극장 앞에서 티켓을 수거하거나 짧은 announcement 전달, 길 안내 등을 하고 있다. 되게 생각보다 심심하다.
그래도 재미있는 사람들도 만나고 있다. 처음 Teacher's Club이라는 극장에서 진행한 봉사활동에서는 아이리쉬인 Justine을 만났다. 땋은 노란 머리에 나이는 40대쯤 돼 보였다. 상당히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오후 시간(Matinee)이 끝난 후 밤 타임 시작 전에 같이 Kingfishers에 가서 밥을 먹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앞에 두고 같이 밥을 먹자니 어색했으나 간단한 스몰톡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대화 도중 계속 창 밖을 보던 저스틴은 대뜸 나에게 "한국에도 약쟁이가 많아?"라고 물어봤다. 한국에는 마약이 불법이고 걸리면 감옥에 가는 등 처벌 수위가 높다고 대답하니 아일랜드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서 갑자기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 지금 취했네"라고 말해줬다.
아니, 눈 씻고 봐도 마약을 한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놀라서 "어떻게 아는거야?"라고 물어보니 갑자기 이사람 저사람을 가리키며 마약을 한 사람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저스틴이 말하기 전에 누가 마약을 했는지 맞추기로 했는데 한 명도 제대로 못 맞췄다. 나중에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비둘기에 이입해선 "Fuck this all. Fuck this Street" 등등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흉내를 내는데 그게 그렇게 웃길 수가 없더라. 더블린에 와서 눈물 날 정도로 웃은게 처음이었다. 알고보니 배우더라.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내가 고영이 좋아한다고 하니 집에 놀러오랬다.
봉사활동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연극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오후 시간인 2:30과 4:00 시작 연극은 Matinee라고 해서 10유로, 7:30과 9:00 연극은 학생 13유로, 일반 15유로다. 연극치고는 비싸지 않지만 그래도 15유로를 절감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물론 자리가 모두 다 차면 못 보지만 지금까지 전체 만석인 경우는 없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Party Boy도 5석이 남아서 나도 볼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연극은 I See You Tom Kennedy, Revolting Women-A Rebel Cabaret, The Baby Monitor, A Southern Fariytale, The Number, A Drunk Lesbian Love Affair, Cello, Schlong Song, Borderline Asshole, Party Boy다. 아아리쉬 작품도 있고 미국 등 해외에서 건너온 작품도 있다. 아쉽게 영어로 상영된다는 점 때문에 아시아 등 비영어권 작품은 없다.
연극이라고 해서 꼭 2명 이상이 등장해서 스토리를 풀어내진 않는다. 한 명 혼자 독백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도 하고 관객과 소통하기도 한다. 그 중 Schlong Song은 정말 문화 충격이었는데 미국인 배우가 나와서 본인의 섹스 라이프에 대해 상세하게 전달한다. 되게 웃기고 배우가 중간 중간 옷을 다 벗는 장면이 있어서 그의 Junk도 보게 되는데(...) 그게 야하지 않고 그냥 웃기다. Party Boy는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인데 사실 나는 웃음 포인트를 잘 모르겠더라. 동성애가 불법이었던 시절,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게이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 코미디라고 하는데 보는 내내 너무 피곤했다. 아무래도 아이리쉬 문화를 모르니 별로 웃기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인상적이었던 작품 중 하나는 A Drunk Lesbian Love Affair다. 이 작품도 배우 혼자 나와서 본인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미국 작품이고 배우가 예뻐서 좋았던듯. 확실히 미국 작품이 특정 문화권 슬랭이 적고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더 재미있는 것 같다.
The Baby Monitor는 생각할 꺼리를 많이 던져줘서 좋았다. GCN 매거진에서 좋은 기사를 써줬다.(링크: https://gcn.ie/baby-monitor-dublin-gay-theatre-festival/) 게이 커플의 자녀 양육권에 대한 진지한 미국 작품인데 단순히 동성 부부의 양육권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종에 대한 문제, 대리모 문제 등도 함께 담고 있어서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최근 한국 퀴어계에서 대리모 산업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뤄지고 있어서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봤다. 하지만 대리모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부차적으로만 짚고 넘어가서 약간 아쉬웠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