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맞이한 첫 LGBTQIA+ 행사
약속을 어겼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브런치를 쓰기로 했던 나의 다짐은 현실의 장벽과 나의 오래된 게으름에 갇혀 각종 합리화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약속을 어기게끔 만들었다.
그래도 괜찮다. 결국엔 다시 들어와서 글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글은 너무나 많은데 내 의식 흐름에 따라서 쓰는 글을 만들기 싫어서 굳이 미뤘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나만 아는 죄책감 속에서 브런치에 접속했다.
그 와중에도 종종 사람들이 와서 내 글을 읽었나보다. 극소수의 사람들이지만 구독을 하고 갔고 그들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글을 남겨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더블린의 주말 밤이다.
일단 짧게 그동안의 근황을 짚자면 회사를 옮겼고 현재 2주째인데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한 이탈리아 사람과 잠깐 연락을 하다가 잘 풀리지 않았고 계속 새로운 사람 탐색 중이다. 약간(이 아니고) 많이 외로운 것 같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더블린 프라이드 페스티벌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참가자가 아닌 봉사활동가로서 함께 했다. 더블린에서 지내는 초기 시간 중 갚진 시간이 될 것 같다.
더블린 프라이드 페스티벌은 아시아권(이라고 하고 한국이라고 읽는다)을 제외하고 내가 처음으로 참여한 해외의 프라이드 페스티벌이다. 그래서 그 어느 시간보다 값지게 보내고 싶었고 그 일환으로 꼭 봉사활동가로서 참여하고 싶었다. 일단 나는 이 국가의 이방인이기 때문에 봉사활동가로서 참여했을 때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제한적이지만 페스티벌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실은 전자의 이유가 컸다. 한국에서 내가 처음 퀴어문화축제에 갔던 것은 공식 사진촬영 봉사활동으로서였다.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지만 당시에 꽤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상 내 첫 퀴어인들을 만난 시간이었달까. 더블린은 한국보다는 더 오픈된 행사를 진행하고 국가적으로도 지지하는 행사이지만 그렇다고해도 난 여전히 이방인이기 때문에 프라이드를 느껴도 모자랄 시간에 혼자 외롭다는 우울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신청했고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봉사활동은 아일랜드 봉사활동 단체인 volunteer.ie 에서 진행한다. 하지만 실제로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더블린 프라이드 사이트에서 지원을 할 수 있다. 앞서 volunteer.ie에서 다른 봉사활동을 신청해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보통 단체들은 아무나 봉사활동가로 받아주지 않는다. 면접을 보기도 하고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포지션에는 이전 작업물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들의 니즈에 만족하지 않으면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더블린 프라이드 봉사활동은 조금 달랐다. 지원자들 거의 대부분을 받아주는 분위기였고 요구하는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더블린 프라이드 사이트에 들어가면 각종 활동 영역들을 설명해놓은 것이 있긴 한데 실제로 그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전혀 언어적 부담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미리 영어 때문에 무서워서 봉사활동 안하면 진짜 손해라고 생각한다. 언제 해외 프라이드 페스티벌에서 봉사활동 해보겠나.
더블린 프라이드 페스티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기업들의 참여가 굉장히 활발했다는 점이다. 더블린 버스부터 시작해서 금융, 소매, 마케팅, IT 등 전방위적인 산업 분야의 기업들이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으로는 구글, 테스코, 마스터카드, 인디드, 아마존, 에어비앤비 등 셀 수 없이 있다. 그 중 테스코는 플래티넘 스폰서라고 해서 각종 물자 지원을 해주더라. 봉사활동가로서 좋은 점은 점심 도시락과 물, 각종 과일과 과자 등을 지원해주고 무엇보다 퍼레이드 이후 이어지는 2부 행사에서 술을 거의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내가 더블린 프라이드 봉사활동을 추천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다.
기업 참여가 굉장히 활발하다는 점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이는 더블린뿐만 아니라 대부분 선진국의 퀴어 문화권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다. 반면 한국에서는 삼성이나 현대차가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 엘지비티 커뮤니티를 위한(혹은 위하는 척하는) 마케팅을 펼치는 동시에 한국에서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아 비판받는다. 퀴어 문화권을 기준으로 했을 때 낙후 국가인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오히려 해외에서는 대기업들의 전방위적인 투자가 저소득층 엘지비티+의 행사 참여를 막는다는 비판이 늘어나고 있다. 재미있게도 더블린에는 프라이드 페스티벌이 있은 후 일주일 다음에 트렌스젠더 페스티벌을 따로 여는데 이 페스티벌의 주요 취지 중 하나가 기업 참여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글을 쓸 수 있겠다.
일단은 더블린 프라이드에 집중하겠다. 몇 주 전 조지 클럽에서 진행된 짧은 오리엔테이션 이후 본 행사 날, 오전에 집결지에 모이니 테스코에서 봉사활동가들을 위한 각종 물자를 제공해줬다. 옷도 줬는데 여름 날씨에 맞게 수분이 잘 증발하기 쉬운 재질로 된 초록색 옷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육식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봉사활동가는 오티 때보다 더 많았다. 어림짐작으로 100명은 넘었다. 그들은 따로 그룹이 지어졌고 내가 속한 그룹은 테스코 트럭 앞에서 이들을 리드하고 트럭에 누군가 갑자기 돌진하는 등의 불상사를 막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돌발상황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고 사실상 테스코 트럭을 따라서 함께 행진하는 일이 다였다. 중간에 어린 애기가 갑자기 트럭으로 뛰쳐들어서 이를 본 대만계 미국인 S가 바로 제지하긴 했는데 이를 제외하곤 위험 상황은 따로 없었다. 사실상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 봉사활동가의 일이었다.
실제 봉사활동가의 업무는 오히려 퍼레이드 이후 더 많아졌다. 종종 우리는 차출돼서 짐을 옮기거나 물을 사러 마트에 가서 양 손 한 다발 물을 들고 오는 등 잡무를 맡아서 했다. 퍼레이드 이후 일들이 사실 봉사활동가의 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이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술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Thanks to Tesco which somewhat makes me feel guilty pleasure.) 이 사실을 아는 봉사활동가는 많지 않은 듯했으나 나는 조금 밍기적거린 덕에 2부 행사가 이어지는 무대 뒤편에 들어가 술을 공짜로 먹고 무대 행사를 가장 앞에서 볼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여러 가지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으면 됐다. 술 때문에 업 돼서 무대 앞에 서서 관객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이런 게 더블린 프라이드 봉사활동가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사람들 만나고 추억 쌓고 술과 음식을 먹고 한번도 해보지 못할 일들을 해보고.
내년에 또 봉사활동을 하라고 하면 아무 고민 없이 예스를 할 것이다. 벌써 2주가 지났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들이다. 보고 싶은 사람도 생각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