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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l Apr 30. 2019

쟈네! 다시 만날거야, 리호

아일랜드에서 만난 가장 멋진 일본인 여성

오늘은 한 사람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주인과 불편해졌는데도 한 달가량 이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버티게 해준 사람, 알게된 지 고작 이십일 만에 헤어져야 하는 사람, 첫 만남에 바로 눈에 들어와 버려 20대 때의 첫사랑을 만난 것 같은 순수함과 쓰라림을 준 사람. 일본인 리호다.


리호가 좋아한 흡연 공간. 아침에 차를 끓여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곤 담배 한 대를 오래도 피우더라.


이 아이를 처음 만난 날은 영화 같았다. 내가 스펜서독에 이사를 오고 나서 밤에 그날 처음 만난 플랫 메이트들과 집주인(새끼)이랑 거실에서 서로 이야기하기 바빴는데 갑자기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정말 영화처럼 누군가의 옆으로 장애물이 걷히며 주변이 밝아졌다. 주인공이 마침내 등장하는 그런 장면처럼 말이다. 바깥의 찬 공기를 머금고 들어온 그의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다.


불현듯 내가 짝사랑 했던 S가 겹쳤다. 내가 제멋대로 고백하고 그렇게 차이고 사이가 어색해진 S, 어쩌다 같은 곳에 출근을 하게 되면서 종종 얼굴을 마주해야 했던 S를 그렇게 닮았더라. 쌍커풀이 없지만 동그란 눈, 넓은 이마, 똑부러지게 생긴 외모, 찰랑거리는 머리와 옅지만 속눈썹 만큼은 짙게 메이크업을 한 리호가 나에게 들어왔다. 속으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나는 최대한 감추고 흔들리는 동공을 다잡으며 리호가 건넨 악수를 가볍게 받았다. 리호의 강한 손아귀힘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 검은 가죽자켓이 잘 어울렸다.


내가 쓴 일기를 보면 리호 때문에 참 많은 ups and downs를 겪었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말이다. 이 집에 들어오고 이틀 후에 쓴 일기에서는 '과거의 헛된 미련과 외로움'을 이야기하며 내 스스로를 한탄했고 그 후로 또 이틀 뒤에는 22살의 리호를 보며 나의 22살을 생각했다. 이뤄지지 못한 사람에게서 온 그리움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리호라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변했다.


내가 처음 리호의 나이를 알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It's not that she looks old but her behavior was something that cannot be expected from a girl in her 22. 조곤조곤하면서 본인 주변의 상대방을 고려하는 언행이 일본인의 특성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리호보다 한 살 많은 중국계 일본인 마야가 하는 행동을 보면 어김없는 20대 초반의 어리숙함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냥 리호가 갖고 있는 특성이었다.


리호는 공부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기자직에도 지원을 했다. 내가 기자였다고 말하니까 일본의 주류 언론사인 니케이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고 나에게 말해줬다.


"지루한 거시 경제를 다뤘어."

"아냐. 전혀 지루하지 않아. 멋있어. 나도 니케이에 지원했는데 떨어졌어."


내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책상은 리호의 공부 공간이었다. 그 책상 위에 놓인 리호의 전공 서적들을 보며 떠나기 전 날 '그 책 어쩔거냐'라고 물어보니 서너권의 무거운 전공 서적을 한가득 가슴에 품으며 말했다.


"나의 소중한 책을 버릴 수 없어. 다 가져갈거야."


정말 귀엽다.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기자를 하고 싶어했다. 기자를 하면 꾸준히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고 특정 분야에 대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첫 직장을 구해야 하지만 5년 이후에는 석사 학위를 딸 것이라고 했다. 학기말 고사 전 시험 공부를 할 때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더라. 그런데 지금 이 집의 환경이 리호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오전 중에 거실에 나랑 리호만 있을 때만이라도 나는 최대한 조용하게 있었다.


일본에 3년째 만나고 있는 체코인 남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3년째 장거리 연애 중이라고 한다. 항상 한 명이 일본에 오면 다른 한 명이 유럽에 있거나 하면서 장거리로 이어지게 됐다. 그래서 어디에서 만날지가 항상 지금까지의 가장 큰 이슈였다고. 현재 그의 애인은 일본에 있고 리호도 더블린에서 시험이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떠났기 때문에 3년 만에 둘은 같은 공간에서 오래 지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타지에서 지낸 외로움 탓인지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꼈고 고백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직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리호,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리호, 어린 나이에 타지에서 살면서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는 리호. 리호의 마음에 응집된 거대한 외로움은 리호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까. 이제 터키 공항에 도착했겠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정말 오랜만이다. 짧은 순간 동안에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을 느낀 것 말이다. 마치 20대 초반의 사랑을 처음 느끼며 설레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웠던 순수한 마음이 상기했다.


귀여운 리호의 마지막 선물. 이번주 토요일 하나 먹어야 한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리호를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가장 예쁜 책갈피를 선물해줬다. 원래 얼굴 보고 주려고 했는데 내가 나가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서 그녀의 회색 점퍼 주머니에 짧은 편지와 함께 넣어줬다. 나의 메시지를 미처 보지 못하고 공항에서 선물의 존재를 알아차려서 예기치 않게 깜짝 선물이 되긴 했는데 이 편이 더 좋은 것 같다. 사랑스러운 그녀. 다시 만나고 싶다. 나를 기억해줄까. 어린 날의 생채기를 만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떠나기 전에 내가 써준 편지를 읽곤 리호는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I'll be independent and strong woman. That's what I want to."

"Of course you are."


그래, 이 정도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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