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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들 Sep 19. 2024

'호호' 불며 꿈의 궁전으로 걸어가다

가슴이 벅차고 기쁨이 가득했다

가슴 시린 청춘 시절의 소회를 아내가 글로 써주었습니다. 짧게 써준 아주 긴 얘기(?)를 '복사-붙이기' 합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지나가는 대학생들이 눈에 밟혀서 가슴에 바람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주변 상황이 편치 않아서 새벽에 일어나 엄마가 계시는 광주로 내려왔다.


공무원 시험 비율이 100:1인 희한한 사회 현상이 있었던 때였다. 나는 공무원시험 학원에 등록하려다가, '기왕에 공부할 바에야 때 놓친 대학을 가자'라고 마음먹고, 종합 입시학원을 3개월 끊었다. 학원에서 돌아와 바로 집 앞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아버지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왔다"라고 밥 먹을 때마다 말씀을 하셔서, 엄마가 차려준 밥상 위에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밥을 먹곤 했다.


1979년, 그 해에는 대학입시 날짜가 최초로 빨리 잡혀서 겨우 2개월 조금 넘게 공부하고 시험을 봐야 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나는 잠보라서 잠을 쫓느라 바가지 커피를 마시면서 죽을 각오로 공부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는 엉덩이를 떼지 않아서 나의 부드러운 엉덩이 살점이 문드러지고 빨개져서 그 쓰라림이 더하여진 고난의 시간이자, 내 인생 최고의 몰입(沒入) 시간이었다.


학원에서 독서실로 바로 직행한 날이면, 으레 엄마는 밥을 싸 가지고 와서 건네주곤 하셨다. 독서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오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엉덩이의 상처는 심해지고 피도 나고 아렸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에게 엉덩이를 보여주고 엎드려서 앉으면, 엄마는 '호호' 입으로 불어서 그나마 아픔을 달랠 수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가족들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라고 했지만, 엄마와 나만 알고 있는 대학 입시 공부를 몰래 한 것이다. '수학과 영어는 반타작만 하자. 나머지 교과는 다 만점이 되어야 한다'라고 전략을 세웠다. 내게는 수학이 가장 쉬운 교과였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기에 아쉽지만 일단 접었다.



예비고사를 치르고 발표하던 날!


버스를 타고 발표 장소로 갔다. 운동장을 지나 담벼락에 컴퓨터 워드로 작성하여 부착된 종이에서 내 이름과 점수를 봤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의 외마디 소리치며, 교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울대는 못 가도 연·고대는 충분히 합격할 점수였다. 호형이에게 놀래주려고 '불합격'이라고 통화했지만, 곧 사실을 말해 주었다. 기뻐하는 모습을 전화 속으로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국가에서 장학금이 나오는 교육대학교에 진학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약 40점 정도가 흘러넘치는 점수가 아까웠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고 교육대학교를 선택했다.



'꿈의 궁전'이라고 생각했던 대학의 캠퍼스!


아담하고 작은 숲길을 거쳐서 여기저기 강의실로 옮겨 다녔는데, 걸어가는 발걸음이며 강의실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쫓아다니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가슴이 벅차고 기쁨이 가득했다. 꿈만 같았다. 강의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삼키려는 듯 열심히 공부했으며, 햇살 보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음악과 전공이라서 새벽에 출발하여 피아노실에서 몇 시간을 연습하다가 수업에 들어가고, 수업이 끝나고 또 피아노를 쳐야 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나는 미발령 대기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3월 1일 자 발령을 받아 교직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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