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재직 시, 1학년을 맡으면 학생들과 받아쓰기 전쟁(戰爭)을 했다.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를 할 범위를 정해주고 그 범위 안에서도 어떤 문장, 어떤 단어를 할 것인지 미리 예고를 해 주고 받아쓰기를 실시했다. 그러다가 동학년 선생님들과 의논해서 아예 받아쓰기 급수 카드를 만들어 나눠 주고, 매일 순서대로 받아쓰기를 했다. 학생들은 받아쓰기를 시험으로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사교육 기관이나 가정에서 미리 예습을 탄탄히 해 온 학생들, 늘 100점 받은 학생들은 기고만장한다. 100점 받으면 공책을 이마 앞에다 두르고 '와, 100점이다.' 환호성 지른다. 한두 문제 틀린 친구도 자랑 대열에 참여한다. 하지만 여러 개 틀린 학생은 풀이 죽고 재빨리 공책을 감춘다. 이처럼 1, 2학년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는 자기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엄청난 매력이자, 반면에 스트레스(stress) 덩어리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받아쓰기를 통해서 서서히 한글을 익혀간다. 되돌아보니, 한국의 초등학교 1, 2학년 학생들과의 받아쓰기는 유쾌한 전쟁이었다. ㅎㅎㅎ
초등학교 1학년 받아쓰기 급수 카드 예시
중도입국 자녀들과의 받아쓰기는 다르다.
중도입국 자녀들과의 받아쓰기는 한국 학생들과의 받아쓰기와는 아주 다르다. 중도입국 자녀들의 한국어 학습 상황을 추적해보면 한국어 익히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소는 한국어 노출 기회의 부족이다. 그들은 학교 생활에서의한국어 노출 기회 외에 학교 밖 한국어 노출 기회는 아주 부족하다. 가정에서 아빠 엄마 어느 분이라도 한국 사람이면 최소의 한국어 노출 기회를 갖지만, 그래도 비교적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많이 사용한다. 특히, 부모가 외국인 가정 자녀인 경우, 한국어 가정 학습 조력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도입국 자녀들과의 받아쓰기는 한글을익히는 중요한 기회로 삼았다.
받아쓰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한국어 지도 과정을 미리 살펴하고 낱말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자료 가운데 낱말 카드는 낱말 익히는 단계를 고려하여 자음, 모음 낱말 카드, 받침 없는 글자 낱말 카드, 쉬운 받침 글자 낱말 카드, 그림카드, 게임용 카드 등 다양한 카드를 동원했다. 카드를 보여 주고 따라 읽기, 자석 칠판을 활용하여 낱말 카드 지도, 구체물과 낱말 매칭(matching) 지도, 소리의 고저를 활용한 낱말 지도, 신체를 활용한 낱말 지도, 매체를 활용한 낱말 게임 지도, 낱말 카드 게임을 활용한 낱말 지도, 춤추며 낱말 지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낱말 지도가 끝나면 낱말 말하기, 읽기, 쓰기 지도를 실시했다. 학생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혼자 말하기/친구에게 말하기/선생님에게 말하기/모두에게 말하기), 읽고(혼자 읽기/친구 따라 읽기/모두 함께 읽기), 쓰기(허공에다 손글씨 쓰기/공책에다 쓰기/칠판에다 쓰기)를 반복하게 한다.
이제 드디어 받아쓰기를 실시했다. 받아쓰기 전 단계로 다양하게 낱말 지도, 낱말 말하기, 낱말 읽기, 낱말 쓰기를 했지만 교사가 불러주는 낱말을 공책에 직접 쓰는 것은 중도입국 자녀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낱말 인지 능력, 글씨 쓰는 능력을 확인하면서 오류 빈도가 높은 낱말은 슬쩍 보여 주며 쓰게 했다. 학생들은 "선생님, 안 보여요. 너무 빨라요. 칠판에 붙여 주세요."라고 말하며 받아쓰기를 즐겼다.
중도입국 자녀에게 받아쓰기는 한글을 익히는 중요한 과정이다.
학생들은 즐겁게 받아쓰기하면서, 반복해서 받아쓰기하면서, 매일 받아쓰기하면서 서서히 한글을 익혀 나갔다. 더디지만 한글 익히기를 단계적으로 확장해 나가며 끊임없이 계속 반복하다 보니 제법 한글을 쓴다. 그리고 매일 받아쓰기할 때 반복적으로 제시해준 낱말은 '학교 이름, 나, 너, 우리, 아버지, 어머니, 오빠, 누나,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등이다. 교사는 학생들이 즐겁게 받아쓰기하도록 춤추며 열정적으로 낱말을 불러주었다. 낱말을 틀리게 쓰면 힌트(hint)를 주고 고쳐주고 칭찬하고 격려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받아쓰기 시간을 좋아했고, 기다렸고, 성공적으로 받아쓰기를 하며 만족감을 많이 느꼈다.
드디어 학생들이 100점을 받았다. 한국 학생들처럼 기뻐했다. 한국 학생들과 달리 받아쓰기 과정을 거치며 받아쓰기를 했지만, 결국 중도입국 자녀들도 받아쓰기를 통해 서서히 한글을 익혀갔다. 어쩌면 그들은 받아쓰기를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한국어를 구사하게 되고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다. 중도입국 자녀들의 한국어 발전과정을 목도하며, 오늘도 나는 한국어 교원으로 한껏 보람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