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고향의 겨울은 농한기라서 아이들은 양지바른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딱지치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삼팔선 놀이하며 해지는 줄 몰랐다. 어른들은 마을 가게나 가정집에서 윷놀이, 화투치기, 음주가무, 수다 떨기 하며 날밤 새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내 고향의 겨울은 노는 사람이 없다. 아예 사람조차 보기 힘들다. 주민들 모두 오전에는 창고에서 섬초를 다듬고, 세척하고, 박스(box) 철해서 마을 집하장에 내놓는다. 오후에는 논, 밭에 나가 섬초를 맨다. 해 질 녘이면 맨 섬초를 집으로 가져오고, 또 섬초를 다듬거나 박스 철해서 마을 집하장에 내놓는다. 12월부터 익년 3월까지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밤낮으로 사람들을 볼 수 없고 동네는 온통 정적에 휩싸인다.
아마 20년 훨씬 전일 것 같다. 내 고향에서 시금치를 재배하기 시작했던 게. 매년 9월에 섬초 씨앗을 뿌리면서 시작되는 섬초와의 전쟁은 익년 3월까지 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내 고향의 겨울이 농번기 철 되어 주민들은 쉴 새 없이 오직 섬초 수확에만 몰두하고 있다.
섬초 매는 할머니
섬초를 매고 있는 어르신을 봤다. 자루를 깔고 앉아 몸을 질질 끌고 가면서 섬초를 맨다. 숫돌을 갖고 다니며 수시로 낫을 갈아 날을 세운다. 팔힘으로 섬초를 매지만, 낫이 잘 들면 팔의 통증을 다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이기에 온몸이 아프다. 특히, 가슴에 통증이 심하고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오므렸다 폈다 할 수도 없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사람들이 매일 병원에 다니며 물리치료와 진통제 주사를 맞고 일을 한다"라고 하셨다.
마을 사람들이 짠하다.
실제로 내가 경험해 보니, 얼마나 힘들고 몸이 아플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일하며 지낸다는 것은 결코 행복의 조건이 아닐 것이다.
돈 번다는 것은 당연히 매력덩어리다.
매일 공판장으로 섬초 박스가 나가고 경매가격이 매겨져 유선방송으로 안내되니, 묘한 중독에 빠지게 된다. 더군다나 현금이 통장에 차곡차곡 적립되니 분명히 엄청난 매력이다. 맹렬히 일하도록 동기부여 될 수밖에 없다. 경매가가 높으면 하루종일 기분 좋게 섬초를 매고, 경매가가 낮으면 내일은 경매가가 높아질 거라는 소망을 품고 섬초를 맨다. 그러고 보니 이래, 저래 열심히 일한다.
금년 설날을 앞두고 섬초 경매가가 폭등했다. 평소 세 배 이상의 엄청난 섬초 박스가 청과물 시장으로 나갔다. 주민들은 밤잠 설쳐가며 출하 물량을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나도 이틀 동안 새벽 한 시까지 섬초 작업을 했다. 눈이 뻑뻑하고 온몸이 천근만근 피곤했다. 하지만 설날 대목을 보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당연히 섬초의 묘한 매력?이다.
시금치 중의 시금치!
섬초의 원산지인 도초도·비금도 주민들은 내일 또 섬초 밭에 갈 것이다. 모두 섬초밭에 가니 나도 자연스레 섬초밭에 간다. 섬초밭이 돈밭? 이기에, 사람들이 돈 따러가기에 나도 돈초? 따러 간다. 어머니와 막내 동생에게 맘껏 돈초를 따주고 싶다. 하하하.
섬초가 돈초이다.
비록 나의 손가락 아프고 온몸이 아파 잠 못 자며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릴지라도 당분간 섬초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