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옛날이 마냥 그립다. 그 잔상이 조각조각의 편린일지라도 퍼즐처럼 다시 맞추면 한 폭의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림은 미완성일 수도 있고 추상화일 수도 있지만 때론 정지해 버린 정물화일 수도 있다. 정지된 화면을 리와인드해 보면 고향인 전주가 눈앞에 펼쳐진다.
누군가와 같이 있었던 경기전, 홍지서림, 임금님다방, 신라다방, 불새다방, 풍년제과, 다가공원, 완산칠봉, 팔각정, 덕진연못 벤치, 전동성당, 교동 기와집 골목길... 그보다 더 길었던 인후동 골목길... 한밤의 노송동 놀이터에서는 알 수 없는 아련한 치통이 도지곤 한다.
셀 수도 없는 밤하늘 별들 속에 반듯이 다린 새하얀 교복 입은 소녀가 방긋이 웃고 있기도 하고,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에 외로운 겨울밤의 전봇대가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 윤동주의 '서시'와 '별 헤는 밤'을 속삭여 준다. "샬롬~" 하며 편지를 건네준다. 가지런히 펼쳐진 네 잎클로버가 편지지 속에서 네모나게 웃고 있다.
소년은 아파 누워서 끙끙대다가 어느새 꿈나라를 헤매곤 한다. 이유 없는 신열 속에 황순원의 '소나기'를 떠올리며 윤초시의 증손녀를 그리워하곤 한다.
옆집 닭이 홰를 칠 때까지 메리가 아침을 멍멍 열어젖히고 기린봉에서 어른들의 외침이 여명을 밝힐 때까지도 소년은 귀를 닫고 뒤척이곤 한다.
이른 잠이 깬 소년은 또다시 몽상에 빠지고 교생선생님의 살폿한 치마를 그리워하지만, 하얀 교복 속의 그 소녀가 또렷한 눈망울로 다가선다.
사정없이 질주하는 들판에서 저 멀리 "나 잡아 봐라~" 하고 도망치는 소녀의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손끝에 잡힐 듯하다.
소년은 죽지 않음을 믿진 않지만 자기 영혼만큼은 영원하리라 믿는다. 소녀가 그녀가 되고 소년이 그대로 불릴 때쯤 코스모스는 한들거리고 굴뚝 속의 연기는 저녁이 왔음을 알린다.
대폿잔을 비운 아버지가 헛기침하며 대문을 차고 들어올 때쯤이면 소년의 눈에도 이슬이 고인다.
소년은 어느새 그리움을 알게 되었다.
가슴 깊은 속에서 마그마가 충돌하며 뜨거운 불기둥이 솟구친다. 소녀가 손 끝에 잡힐 듯 말 듯 흰 치마를 너풀거리며 저 산 너머로 날아가버린다...
이 혹한이 지나가고 곧 다가올 봄을 그리워하며 기지개를 켠다. 저 너머 모퉁이에서 하늘하늘 엄마 치마를 넘어 아지랑이가 현기증처럼 다가온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