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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그리고 여러 모임들

우정과 인연의 끈

by 글사랑이 조동표

초등학교 동창회장을 15년 넘게 맡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회장은 최근에 4년간 맡았다.


두 모교는 3.1 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 개교를 했기에, 회장으로 재임기간 중에 개교 100주년 행사를 치렀다. 모두 행사비용이 필요했으며 졸업생들의 모금을 독려해야만 했다.


초등학교는 우리 졸업 기수가 중심이 되어 학교 입구에 100주년 기념비도 건립하였고 적잖은 행사비를 찬조하였다. 국회의원을 역임한 분을 총 동창회장으로 옹립하며 한 고비를 넘어서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수도권에 전현직 유명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모임이 있고, 거기서 간사 역할을 맡아주길 요청받았지만 쉬고 싶어서 거절하였다. 다만 우리 기수인 동기들 모임만 챙기기로 했다.


우리 동기 모임은 고향과 수도권으로 나눠서 만나지만 1년에 한 번씩 개교기념일 즈음에는 다 같이 모여서 모교를 방문하고 고향의 명소를 같이 걸으며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100주년 행사를 기점으로 모은 회비가 남아 있어서 그것으로 경비를 충당하며 만난다.


초등학교 동창모임은 세월도 오래 지나서 퇴색한 앨범을 보는 듯하고 친구 구성원들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또 3학년부터 분반으로 나뉜 여학생들도 마주해야 해서 조심스럽기도 하다.


모교는 옛날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고 강당 근처에서 놀던 추억을 되살리며 운동장을 걸으면 새록새록 추억이 되살아난다.


어리디 어린 고사리 손으로 장차 뭔지 모르지만 큰 일을 해보겠다고 똘똘한 눈을 반짝이면서 놀던 그 시절이 정겹다. 54회 졸업생이고, 6학년은 11반까지 있었는데 739명이 졸업했다.


인근의 고아원에서 두세 살 많은 형님 뻘의 고아원생들이 학급에 대여섯 명씩 섞여 있었고, 기린봉 산밑에 살면서 도시락도 못 가져오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도 많아서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을 꺼려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다행히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고 반장도 맡았었으며, 어린이회 회장단도 맡았다. 간염을 앓기도 했지만 6년 개근으로 무난히 졸업을 하였다.


중학교 동창회는 당시 고교입시 대비 두 개의 특수반을 따로 3학년에 편성하여 그 친구들 중심으로 모임을 가진다. 우리 학년은 일곱 반이었고 학생 수는 490명 정도였다.


나는 15회 졸업생인데, 70명씩 두 반으로 140등까지를 2개 반의 특수반에 섞어서 배정하였다. 2학년 말 겨울방학부터 등교시켜서 공부기계를 만들었지만, 지역 명문고에는 30명 남짓 비교적 적은 숫자만 입학하였다.


이 중에서 자신이 졸업한 출신고의 동창회장을 맡아 헌신한 인물이 5명이나 배출되었고, 현재 국립대학교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똑똑한 기수였다. SKY 대학을 포함한 일류대학에 수십 명이나 합격하였는데, 현재도 이 친구들이 40명 정도 모인 단톡방에서 매일 수다를 떤다.


수도권은 정기 모임이 1년에 4번은 있고 수시로 골프나 당구, 등산 등 소모임이 있다. 제법 재력이 있는 친구들이 모임의 경비를 책임져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는데, 내가 창업했을 때 가장 많이 화분을 보내주며 축하해 준 것이 중학교 동창들이다. 입시지옥을 처음 겪으며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하던 시절이었고, 사춘기의 호르몬에 여드름이 얼굴 한가득 꽃을 피웠었다. 정겨운 이 친구들과는 아직도 반말을 하기가 편하고 고향에서 다 함께 가을에 만나는 지방과 수도권의 통합 모임을 학수고대하게 한다.


고등학교는 지역 명문고로 12반(이과 8반, 문과 4반) 720명 정원이었다. 1977년에 입학하였고 기수로는 57회였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매년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학에 수백 명씩 입학시켜서 언론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던 지방 명문고였다.


우리가 입학했던 1977년에는 평준화 지역의 학생들까지 단체로 대형버스 여러 대에 나눠 타고 입시를 보러 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던 높은 인지도의 명문고였는데, 고교 경쟁시험에서 여러 번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관계, 법조계, 의료계, 학계, 재계 등에서 요직을 거친 인물들이 많으며, 졸업을 같이 한 3학년 우리 반 60명 중에서 서울대에 10명의 합격생을 배출하였고,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가 15명이나 된다. 박사학위 소지자가 20명이 넘으며, 서울대를 포함한 교수님이 5명이나 있다. 하지만 벌써 세상을 하직한 친구들도 6명이나 된다. 졸업 100주년 행사에서는 우리 기수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는 회장으로서 4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는데, 당시 100주년 행사를 위한 모금 활동에서 전체 동문들 중에 우리 기수가 최대 금액을 모은 성적을 올렸고, 57회라는 기수의 위상을 총 동문들에게 각인시키게 되었다. 그전까지 미미했던 존재감을 크게 부각한 데에는 열성 회장으로서 분주히 활약했던 내 역할이 컸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회장활동을 수행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수많은 친구들을 얻은 소득도 있었던 반면, 기존에 수 십 년간 친했던 친구들과 소원해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행사모금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반별로 경쟁을 시키게 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사는 인생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고 희생만 강요하는 동창회장직에 몸이 부서져라 열중할 필요가 있느냐는 다소 힐난성 거리 두기의 결과이기도 했다.


집에서조차 응원을 받지 못했으며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동기들을 이끌어야만 했는데, 코로나19 시국으로 임기를 한번 더 연장하면서 졸업 42주년 행사까지 치러내야 했다.


의미가 있었던 것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 명의로 십시일반 모금활동기획하고 주도했던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어,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친구들을 한 데 모은 구심점이 동창회가 되었으며, 동창회가 비로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한 시점이었다고 회고한다.


반모임을 포함한 대중소 모임이 많다 보니 가장 만나는 빈도수가 많은 동창들이며 애경사와 비즈니스로써의 협조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단톡방에는 330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매일매일 이야기꽃을 피운다. 내 경우 4~7명끼리의 소모임으로 친하게 만나는 모임이 따로 있고, 3학년 반창회는 매년 지방에 사는 친구를 순회하면서 유대감이 강한 관계를 40년 넘게 잇고 있다.


대학교는 같은 전공을 동문수학한 선후배와 고교 선후배의 모임이 중심이고 동기들과의 접점은 별로 없다.

아무래도 수업을 같이 들었던 2년 밑의 1982년 입학생들이 더 가깝지만, 그들과도 애경사 참여나 비즈니스 관계는 적은 편이다.


하지만 도원결의한 선후배 삼총사가 있고 자취촌에서 고생을 같이한 고학파 6인 모임(포도원친구들)도 40년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회사에서의 만남은 입사 초기부터 15년을 같이하며 회사의 뼈대를 만들고 성장시키고자 보람차게 일했던 OB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퇴직을 같이 했던 조직원들과의 유대가 끈끈하다. 동창회는 아니지만 동고동락한 전우애가 있고, 30대부터 50대까지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기의 깊은 정이 배어있다. 지금도 애경사와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정기 모임을 반복하고 있으며, 조직을 떠났어도 만남을 이어가는 15명 모임이 만들어져 있다.


동창회는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죽마고우(竹馬故友)의 의미가 크고, 사회에서 만나 어우러진 모임은 같은 역경에서 우정을 나눈 진한 동지애가 강하다.


이 모든 만남이 앞으로도 30년은 이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이미지: 개교 100주년 초등학교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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