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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둔벌 야화(野話)

1980년대 군사정권 치하의 대학생활

by 글사랑이 조동표

바야흐로 군사정권 군홧발이 캠퍼스를 얼어붙게 한 1980년대 초반. 청운의 꿈을 품고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복학생들과 일반 학생들이 어울려 수원의 농대 캠퍼스 주변 서둔 벌에 옹기종기 터를 잡았다. 본고사 입학시험 날 처음 와본 수원캠퍼스는 인근 공항에서 출몰하는 비행기 소리로 수업을 잠시 멈추기 일쑤였지만, 관악캠퍼스와는 다르게 인정과 낭만이 넘치는 곳이었다. 관악의 1년은 휴교령과 데모로 너무나 짧았으나 서둔 벌의 3년은 30년 세월로 느껴질 만큼 추억이 많다.

본고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난생처음 수원에 올라온 날, 고교 선배들은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필기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너희들은 다 합격자들이다. 우리의 후배들이다. 이제 농민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며, 식당에 데려가 큰 대접에 소주 1병씩을 부어 원샷을 시키고 청자 담배를 입에 물려주었다. 태어나 처음 마셔 본 소주의 과량섭취와 역겨운 담배 연기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는데, 거기에다 영하 15도의 오밤중에 양말까지 벗기고 캠퍼스 울타리를 구호 제창과 함께 달리게 하였다. 이 여파로 다음날 색맹검사에서 떨어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재수해 이과에 진학하였으니 색맹은 아니었다. 군사문화의 잔재인지 지방 출신의 정을 표시한 것인지 모를 선배들의 끈끈한 연대는 처음 가 본 다방에서 커피로 마무리되었다.

캠퍼스 후문으로 이어진 길가에는 나무 생김새에 따라 남녀 성기로 의인화한 '농대의 성(性)'이라는 해학적인 팻말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는데 입시에만 몰두했던 청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사뭇 충족시켜 주고 있었다. 얼큰하게 취한 밤에는 정문에서 후문까지 소변을 갈기며 치기 어린 요연지기(尿然之氣)를 누렸는데 주로 뻥 뚫린 나무에 배설을 하곤 하였다. 막걸리 한 사발에 지성인의 풍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파락호로 변신하였다.

많지 않은 수의 여학생들은 모름지기 숨어서 흡연을 해야 했고 어쩌다 복학생 선배의 눈에라도 띄면 심한 욕설을 감수해야 했다. 여자가 어디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냐며 손찌검을 불사한 선배도 있었으니, 여권(女權)은 아직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복학생들은, ‘한산도’, ‘은하수’, ‘청자’, 용돈이 넉넉한 친구들은 ‘솔’, ‘거북선’, ‘태양을 피웠다. 가판대의 까치담배는 100원의 동전으로 담배에 굶주린 고학생에게 도넛 만들기의 행복을 선물하였다. 돈이 없어 ‘환희’나 ‘새마을’을 피우기도 했고, 버려진 각종 꽁초를 주워 습자지나 성경책 종이에 비벼 모아 둘둘 말아 올린 후, 비교적 깨끗한 필터로 밑을 틀어막아 오묘하게 믹스된 꽁초의 맛을 보기도 하였다.

도서관 신문진열대에는 언론을 장악한 서슬 퍼런 체육관 정권을 추앙하는 기사를 훔쳐보는 눈망울로 번뜩였다. 신문 1면은 늘 전XX 각하의 시국담화문과 국정시책으로 장식되었다. 도서관에 짭새가 들어온다는 소문에 신문을 읽고 함부로 비판도 못하였다. 정부를 비판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다는 괴담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시작된 프로야구는 비슷한 시기에 창간된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하였고, 선수 타율까지 외우는 학생이 생겨났다. 도서관 화장실 벽엔 음담패설과 반정부 구호 등으로 온갖 낙서들이 빼곡했고, 가끔 가슴 두근거리는 연애소설도 등장해 다음 스토리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도서관 입구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빼곡하였는데 정권에 반항하는 학생들의 논리 정연한 문장들로 촘촘히 메워졌다. 날 선 이념논쟁으로 교수와 대립하는 학생들의 외침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념에 사로잡힌 어떤 학생은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는 은사에게 언성을 높이고 구호를 외치다 캠퍼스에서 모습을 감추기도 하였다. 시대가 가져온 비극으로 사제 간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장면이 얼마나 많았던가! 교문 앞의 서둔교까지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장한 기동타격대와 밀고 밀리는 이데올로기 육박전이 전개되는 날들도 많았다. 농대를 다니다 전투경찰로 간 학생이 동기와 마주하는 아이러니한 장면도 연출되었다. 경찰서나 보안사에 불려 갔다 온 선후배들은 유난히 창백한 얼굴이 되어 말수가 줄어 있었다. 누군가는 소리 없이 전방에 입대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대를 한탄하였지만 대놓고 비판도 못하였고 학생들 틈에 프락치가 섞여 있다고도 하였다. 심지어 가짜 대학생에게 사기도 당했었다.

시험 기간 책상 위엔 커닝용 키워드가 가득했는데 학생들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신 교수님과 조교들은 시험 시간마다 자리 이동을 지시했으며, 이때마다 학생들은 자신이 적어놓은 키워드를 외우고 지우느라 혼비백산하였다. 잘 정리된 노트들은 교문 앞 문방구에서 수십 부씩 복사되어 족보가 되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기출 문제지를 구한 친구는 인기가 급상승했고 시험지에 엇비슷한 문제를 마주하면 득의만만한 미소가 입가를 맴돌았다. F학점만은 면하게 해 달라, D학점이라도 달라는 학점 구걸은 교수님 댁 가정방문으로까지 이어졌다.

전공필수 과목에는 기를 쓰고 A+ 받으러 눈을 비벼댔고, 실습시간에는 온실로, 산으로, 축사로 현장을 누볐다. 탐방학습은 모처럼 캠퍼스를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하였다. 4학년 전공필수과목으로 지리산 실습이 있었던 임학과는 15일간의 합숙 탐방이 이어졌는데, 지형성 폭우에 슬래브 지붕이 무너져내려 산장에 잠들었던 학생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안전의식과 인프라가 취약한 시절이었다. 만약 그 당시에 핸드폰이 있었고 SNS가 발달했더라면 큰 이슈가 될 뻔한 사고였다.

봄가을 축제에는 농악대의 사물놀이에 어깨춤이 절로 들썩거렸다. 암울한 시절의 축제는 그나마 해방구였는데 수많은 서클들이 흥겨운 한마당과 함께 잔치를 벌여 주었다. 축제 후에는 학교 앞 당구장과 막걸리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돈이 없어 대신 맡긴 학생증과 전자계산기, 시계와 전공 책들로 가득하였다. 이 또한 주인장과 친해져야 가능했다.

‘전봇대식당’에서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아침이슬’, ‘상록수’, ‘농민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다가 하루가 저물어 갔다. 전봇대 아래엔 전날 속을 비워낸 라면 토막들이 가난한 학생들의 안주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하였다. 다리 건너 ‘부영식당’ 노트에는 한 끼를 때우고 정산하던 볼펜 사인이 어지러웠다. 친구 이름으로 끼니를 때우던 자취생도 있었고, 이즈음 하취(자취생이 밥을 사 먹는 생활)라는 신조어도 등장하였다.

후문의 ‘마로니에’에서는 학생들과 교수들의 담소가 이어지기도 했으나, 한 켠에선 아베크족의 농밀한 밀어가 담배 연기 속에 아른거렸다. 탱크라 불렸던 우람한 여종업원은 어찌 그리도 학생들의 족보를 잘 꿰고 있었던지…‘마로니에’를 지나 바로 옆의 ‘양지농원’에서는 소텐(소주+써니텐)과 소콜(소주+콜라), 소사(소주+사이다)를 주전자에 섞어 마셔, 대낮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홍익인간(紅益人間)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대를 한탄하랴, 과모임을 즐기랴, 데이트하랴, 문전성시였다. 딸기와 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에는 타지에서 온 여학생들로 붐볐다. 전국적인 농대 각 과의 체육대회가 학교를 돌아가며 가을마다 열렸는데, 어느 해 고대 운동장에서 열린 체육대회에 참가한 1학년 학생이 아침부터 권하는 막걸리 통을 고대 학생들과 같이 비우다 졸도하기도 하였다. 그 학생은 사흘간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고 하는데 막걸리 실력은 1학년 때부터 고대에 지지 않았다.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국풍' 등에서 배출된 학생 가수들의 '나 어떡해’, ‘탈춤을 추자’,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젊은 태양’, ‘나는 바람이려오’ 등의 노래가 어느새 브라운관을 점령했고, ‘아침이슬’ 같은 금지곡을 몰래 부를 때면 유난히 숙연해지기도 했다. ‘샌드페블즈’, ‘이수만’, ‘산울림’ 같은 동문들이 방송을 타면 절로 흥에 겨워 다 같이 통기타를 두드리며 합창을 했었다. MT, 체육대회, 과 단합대회, 동창회, 서클 등 모든 모임에서 모였다 하면 막걸리에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춰 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깊은 뱃속에서 울려 나오는 장엄한 ‘상록수’로 자리를 마감하였다. 대낮부터 막걸리 통을 갖다 놓고 술을 마셔 가며 응원하는 체육대회를 묵인해 준 학교가 너무 고마웠다.

두툼한 야전잠바와 군복 바지로 한 해를 때우던 시절, 1학년에는 문무대 입소로 군대 맛을 보고. 2학년엔 15일짜리 전방 입소로 실전 훈련을 하였다. 하얀 제복의 ROTC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언제쯤 병역을 마쳐야 하나 고민도 많았다. 졸업논문을 쓰려 경기도 모든 군청을 돌며 앙케트 조사를 하여 작성한 논문이 지도교수님 눈에 들어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았으나, 가정 형편상 취업을 택해야만 했던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다. 농대에서는 기술고시에 지원할 수 있는 학과가 몇 개 있었는데, 밤을 새워 공부하여 고위직 공무원이 되기도 하였다.

후문을 나서면 하숙집과 자취방이 이어졌는데 새로 지은 ‘상록사’에서 한 학기라도 지내고픈 희망에 학점 관리하여 기숙사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보이면 그렇게 뿌듯해할 수가 없었다. 기숙사는 자취생들의 로망이었다. 자판기와 컵라면은 신기하기만 했고, 공중목욕탕이 개방되는 날이면 미식축구부원들에 더하여 인근 하숙생과 자취생들까지 붐벼서 비누거품 물이 꺼멓게 물들었다. 홈커밍데이에 참석할 파트너를 구하러 수원역을 헤매었고, 수학여행을 가고 싶어 향토장학금을 신청하기 위해 기숙사 앞의 공중전화 앞에서 긴 줄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숙사 TV 앞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팀을 응원하는 학생들로 붐볐는데, 어릴 적 김일 레슬링을 보던 추억을 야구가 대신하였다.

자취생들은 기숙사 밥이라도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어떤 학생은 빈 플라스틱 통을 들고 기숙사 주방에 잠입하여 흰 장화 신은 아줌마에게 몰래 김치를 구걸하곤 하였다. 고향의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되어 김치에 오곡밥을 싸 들고 자취방에 오시기도 하였지만 인근 선후배들이 모여들면 한 끼 만에 없어지곤 하였다. 전기 요리기를 몰래 숨겨서 찌개를 끓여 먹다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온 것을 보고 의심한 주인아줌마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하였다. 자취하라고 보내준 월 7만 원 향토 장학금에서 만 원을 뚝 떼어 원서도 못 사 보는 의대 친구에게 매월 송금한 학생, 처지가 딱한 후배를 거둬들여 밥을 해 먹이고 빨래하는 법도 가르쳐 주고 속옷과 양말을 나눠 줬다는 미담도 있었다. 반찬이 없어서 밥만 지어 날달걀 하나 톡 깨어서 간장에 비벼 먹는 날도 많았다. 둘이 자취방을 같이 쓰며 통일벼로 배를 채웠으며, 번개탄을 피우다 연탄가스를 마시고, 찌그러진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동기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 잠들어 아침에 주인아줌마가 동치미를 먹였는데 다들 비틀거려 수원시내 도립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연탄가스 중독은 매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였다. 막걸리와 소주가 주종이던 시절, 어쩌다 선배들이 맥주라도 사 주는 날이면 500CC, 1000CC 원샷 겨루기가 열리곤 했다. 때마침 등장한 ‘캡틴 Q’ ‘삼바 25’ ‘나폴레옹’ 같은 싸구려 양주는 사흘간 두통을 유발하였다.

냄비에 김치찌개를 끓일 때는 석유곤로가 중요한 취사도구였다. 3월이나 11월의 추위에는 석유곤로에 냄비로 물을 끓여 머리를 감았는데, 고무대야에 하이타이를 풀어서 속옷 빨던 나날들이었다. 작두나 우물이 있는 주변은 빨래터였고 빨랫줄의 수건과 양말은 마르기가 바쁘게 주인이 바뀌었다. 매직펜으로 이름을 써놓았던 내 양말을 옆집 선배가 버젓이 신고 있어서 실소를 머금기도 하였다.

서둔동 뒷 동네 포도원 오솔길을 헤집고 가면 포도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자취방이 있었다. 이층침대까지 올리고 복학생과 현역이 어울려 3명이 동거하면서 사랑방의 구심점이 되어 온갖 학생들이 드나들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내기 고스톱을 쳤어도, 졸업식 단과대학 수석을 배출하였고, 교수가 되었고, 글로벌 리더가 되었다. 그들은 포친(포도원친구들)이란 모임을 결성해 서둔벌의 40년 우정을 지속하고 있다. 가난하였지만 낭만이 있었고 한솥밥을 먹은 형제애가 있었다.

농활, 공활, 야학..., 어둠 속에서 빛을 갈구하던 영혼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는가? 민주투사가 되었는가? 정치인? 아니면 공무원이 되었는가? 직장인이 되었는지 교수가 되었는지 기업인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서둔벌의 정기를 받아 지구촌 어딘가에서 유쾌한 중년을 맞이하고 있으리라. 벌써 인생 이모작에 접어들었을 80년 세대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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