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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Jan 09. 2024

나무를 보며

신령스러운 나무들

밤늦은 가로수길을 혼자서 걷습니다.

늦은 밤은 칠흑같이 어둡고 가로등만 간간이 보입니다.

문득 근처의 나무와 꽃밭을 쳐다봅니다.


철쭉과 이팝나무는 이미 졌고 새빨간 5월 장미와 하얀 산딸나무 꽃이 피어 있습니다.

혼자서 상념에 잠겨 봅니다.

저 아름다운 꽃에는 소녀와 선녀와 천사 같은 요정들이 숨어 있을까?


그런데 가까이서 나무를 보면, 잎이 푸르고 무성하며 가지는 길게 뻗어있어 무섭기까지 합니다.

나무가 커져 보이니 나는 왜소해 보입니다.

5월이면 정말 잎이 푸르고 무성하거든요.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듭니다.

꽃에 요정이 숨어 있다면 나무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나무에도 각각의 정령(精靈)이 스며있을까?


왠지 나무에게는 정령이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천사나 소녀의 이미지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크고 오래된 나무는 왠지 남성스럽고, 뭔가 신비스러운 느낌이 스며들어 있을 법합니다.


밤늦게 쳐다보는 나무는 족히 20m가 넘고 이파리는 무성하며 웅장한 자태로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말 장군목 같습니다.


저 나무에는 필시 내가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굳건한 그 무엇이 스며 있을 겁니다.

직경이 1m도 넘는 너른 나무의 밑동과 가지의 폭은 가히 위협적이며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높이 쳐다보니 그 높이가 아파트 5층을 넘어 보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나무는 남자이고 대장군의 영이 서려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나무를 바라보며 경외감을 느낍니다.


괴상하게 생긴 나무는 얼마든지 있고, 할머니는 나무를 보며 소원을 빌기도 했으니 필시 신령님이 거기 계실 겁니다.


나는 나무를 좋아하지만 두려워하기도 하며 무서워도 합니다.


나무는 아무 말이 없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봐주며 손도 내밀어줍니다.


그러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이파리가 후드득 흔들리고 가지가 휘어지면서 소리가 나면 으스스해집니다.


이 늦은 시간에 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내가 웃깁니다.

보면 볼수록 저 나무에는 분명 정령이 숨어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위대한 인간도 절대 갖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원이라도 빌어 보는 거겠지요.


무수한 뿌리와 가지 끝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고 선이며 완성된 모습입니다.


나무는 봄여름가을겨울을 이겨내며 인간이 누리지 못하는 천수를 누리기에 더 부러움의 대상이지 않을까요?


1000년도 넘은 나무가 엄연히 살아계시니 숭배의 대상이겠지요.


지금 이 시각, 밤 12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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