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겨울이 오기 전이면, 어김없이 집집마다 김장 준비로 부산해지던 때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김장 문화도 많이 달라지고, 도시 생활에서 김장을 직접 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제 기억 속에는 여전히 생생한 김장날의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우물가에 모여 수백 포기의 배추와 무를 다듬고, 양념을 섞으며,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가며 김장을 하던 그 따뜻한 풍경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김장날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외숙모와 마을 아줌마들이 하나둘씩 우물가에 모여들었습니다. 새벽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아줌마들의 얼굴은 벌써부터 활기가 넘쳤습니다.
김장날에는 우리 엄마도 평소보다 부지런히 움직였고, 저 역시 그 현장을 따라다니며 작은 손으로나마 돕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날만큼은 나도 어른들 사이에서 한몫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짐 나르기나 방앗간 심부름, 물을 퍼오는 일 같은 자잘한 일도 즐겁기만 했습니다.
우물가에 쌓여 있는 배추와 무가 마치 작은 산처럼 보였습니다. 평소에 드물게 보던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다로 가득 찬 김장 현장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아줌마들은 서로 소금에 절인 배추를 씻고, 물을 뿌리고, 양념을 꼼꼼히 발라가며 손끝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생선 젓갈과 매콤하고 달콤한 양념 냄새가 코끝을 간질일 때면, 마치 무언가 신비한 주문을 외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정성으로 김치를 담그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우물가에서 잠깐 쉬며 따끈한 막걸리 한 잔을 돌려 마시기도 하고, 김장날을 맞아 나온 떡이나 과일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엄마와 아주머니들이 다정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저 어른들이 신기해 보였고, 그들 사이에 끼어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어른이 되어가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 김장날의 풍경이 흔치 않지만, 어머니와 함께 우물가에서 김치를 담그던 그 시절의 기억은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김장이 단순히 겨울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이어가는 정과 공동체의 의미를 담은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와 외숙모도 안 계시고 그때의 아주머니들은 다 할머니가 되었거나 저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우물가도 사라졌고 김장을 하지 않는 집도 많아졌습니다. 배추도 중국에서 수입해서 김치를 담그는 시대입니다.
겨울을 준비하며 오손도손 모여 정담을 나누던 우물가의 추억도 아스라이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총각김치에 고구마,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한 끼를 때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