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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Dec 27. 2024

달력과 수첩

연말의 풍경

   해마다 연말이면 찾아오는 일상의 풍경이 있다. 내 책상 위를 장식하던 탁상 달력과 손에 꼭 맞던 수첩들. 한때는 흔하게 받아 쌓아 두고도 다 쓰지 못했던 그 물건들이, 요즘은 문득 아쉽다.


   직장에 다니던 시절, 연말은 늘 달력과 수첩의 계절이었다. 은행, 보험사, 항공사, 자동차 회사, 여행사 등에서 보내온 달력과 수첩들은 창고에 쌓여 가서 주변에 나눠주는 게 일상이었다. 심지어 동네 병원 로비에는 '제발 가져가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무료로 나눠주는 달력들이 즐비했다.


   감성적인 풍경과 사진으로 꾸며진 달력을 보며 다음 달이 궁금해서 미리 들춰보곤 했다.


   회사에서도 부서 예산으로 본사에서 만든 스포츠 스타들이 담긴 고급 달력이나 수첩을 마음껏 구입할 수 있었던 시절이 이어졌었다.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의 역동적인 순간을 포착한 스포츠 캘린더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었고, 한때 김연아가 모델로 등장했던 달력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직장을 떠난 지도 벌써 3년. 지금의 나는 그 흔하디 흔했던 탁상 달력 하나조차 구하기 어렵다. 연말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달력 하나라도 구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결국 아들과 딸에게 SOS를 보내 가까스로 하나씩 얻어냈다. 아들이 구해준 무채색의 단순한 디자인의 탁상 달력과 딸이 직장에서 구해온 작은 수첩. 그것으로 올해도 책상 위와 가방 속이 채워졌다.


   이런 변화는 시대의 흐름일까, 아니면 내가 떠나온 직장이라는 현실의 울타리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세상은 더 이상 종이 달력과 수첩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듯하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모든 스케줄을 관리해 주는 시대, 디지털의 편리함 속에서 종이의 감성과 아날로그의 따스함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종이 달력의 따스한 손맛을 그리워한다. 손으로 넘기는 페이지마다 새해의 소망을 담고, 연말이면 한 해의 발자취를 돌아보던 그 감정은 디지털 기기가 대신할 수 없는 것 같다. 달력 한 장을 넘기며 느끼는 작은 설렘, 수첩 속 빈 페이지에 글을 적어 내려갈 때의 소소한 행복. 그것들은 내게 단순한 물건 이상이었다.


   이제는 구하기 어려워진 달력과 수첩을 손에 넣으며 문득 깨닫는다. 이것이 단순히 물건의 부족함이 아닌, 나의 삶이 한 시절에서 다른 시절로 넘어왔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것을. 직장의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이제 나만의 시간표를 만들어가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연말이면 여전히 아련하게 다가오는 달력과 수첩의 기억. 그것은 내가 지나온 시간과 변해가는 세태를 담아낸 작은 거울 같은 존재다. 시대는 바뀌었고, 나의 자리도 변했지만, 아날로그 속의 온기는 여전히 내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이미지: 다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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