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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풍경 속을 거닐다

호암미술관 전시를 다녀와서

by 글사랑이 조동표


요즘 호암미술관에서는 겸재 정선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화풍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표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전의 산수화가 중국의 이상적인 풍경을 모방한 것이라면, 정선은 실제 한국의 자연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린 '진경(眞景)'을 추구했다. 특히 금강산, 인왕산, 한강 등 실경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다.



정선은 붓을 과감하고 자유롭게 사용하면서도 치밀한 구도를 갖췄다. 굵고 힘 있는 선으로 산세를 표현하고, 농담(濃淡)을 조절한 묘사로 입체감과 생동감을 살렸다.



전통적인 수묵화 기법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때로는 연한 색채를 가미해 한국 자연의 정취를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산의 형태나 굽이치는 강물, 전통 마을 풍경 등 한국 고유의 지형과 분위기를 화폭에 담아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포>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 조선 후기 회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호암미술관을 찾은 날, 나는 마치 조선의 시간 속으로 한 발 내딛는 기분이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보기 위해 방문한 전시장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그림 감상이 아니었다. 그가 붓끝으로 남긴 산과 물, 안개와 바람, 조선의 강산과 사람들...

그 속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처음 마주한 인왕제색도 앞에서는 한참을 발걸음 떼지 못했다. 비 오는 인왕산의 기운이 고요한 먹빛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고, 산세의 깊이마다 배어 있는 겸재의 마음이 느껴졌다. 비에 젖은 기와집, 축축하게 내려앉은 안개, 그리고 바위 위를 스치는 붓질 하나하나가 어쩐지 따뜻했다. 그는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풍경 속의 숨결을 그려낸 것 같았다.



금강전도, 금강내산총도, 구룡연도, 옥순봉도에 이르면 시선이 높아진다. 마치 겸재가 시간과 중력을 초월해,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려낸 금강산의 파노라마. 봉우리 하나하나를 꿰뚫는 시선은 마치 오늘날의 드론 촬영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 정밀함 속에도 붓 끝의 여백은 여전히 살아 있어, 오히려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감흥을 준다. 겸재는 산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산이 된 사람처럼 그렸다.



그림 속 금강산은 단지 명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공간이자, 조선이 품은 자연의 정수였고, 겸재 자신이 내면 깊숙이 껴안은 경외심의 대상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림 속 계곡을 따라 걸었고, 물소리를 들었고, 안개 자락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한켠에 전시된 노백도, 사직송 등 소나무 그림들 앞에서는 오랜 시간 머물렀다. 굳세고 고고한 그 선들 속에는 단단한 정신이 서 있었다. 노송의 옹이마다 새겨진 세월의 깊이, 거센 바람에도 뿌리내린 존재감은 마치 조선의 어떤 이상향을 그린 듯했다. 겸재가 그린 소나무는 자연의 일부인 동시에 조선의 정신적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림에 깃든 공간은 자연만이 아니었다. 한양진경, 그리고 작자 미상의 한양도성도를 통해 마주한 옛 한양은, 한 점의 풍경화라기보다 살아 있는 지도 같았다. 누군가의 발자취가, 웃음소리가, 장터의 소란이, 성 밖으로 흐르는 강물의 숨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단순히 도시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겸재는 조선의 자연을 그렸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그렸다.


진경산수란, 진실한 경치를 그리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 진실이란 단순히 실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서와 철학, 그리고 그리워하는 마음까지를 담아낸 것 아닐까. 겸재의 산수화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현실을 벗어나지 않되, 현실 너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정선의 부채화(扇畵)는 말 그대로 부채에 진경산수화의 미감을 부채라는 소형 형식에 담아낸 회화 장르이다. 접이식 부채나 단선 부채의 곡선 구조에 맞춰 그림을 구성했는데 일반 회화보다 작고 간결하면서도, 그 안에 섬세한 구도와 깊이를 담았다.


주로 한국의 실제 명승지인 금강산, 한강, 인왕산, 북한산 등을 소재로 자연경관을 이상화하지 않고, 현실감 있게 재현하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크기가 작아도 붓 터치가 생생하고 밀도가 높으며 공간의 압축과 구도의 절제가 뛰어나다.


실용품이자 예술품으로 애호되었으며 양반들이 여름철 부채로 사용하면서도, 선물이나 수장품으로도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정선의 부채화는 단순한 소형 그림이 아니라, 그의 진경산수 정신과 조형미를 축소된 화면 속에 응축한 예술이다.

부채라는 매개를 통해 일상의 미적 향유와 회화 예술의 결합이라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8폭의 화훼영모화를 보며 그의 사실적인 묘사와 관찰력에 감탄하였다.


전시장을 나설 때, 나는 괜스레 주변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정선의 눈으로 보면, 저 나무 한 그루, 저 바위 하나도 한 폭의 그림이 될 수 있으리라. 겸재의 그림은 과거의 조선을 그린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조선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호암미술관의 봄날, 나는 진경산수화 속을 천천히 산책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선의 아름다움과 겸재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나 자신의 내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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