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다시 떠오른 친구, 그리고 그의 시선
기홍석, 고등학교 3학년 때 가끔 스쳐 지나친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과서 너머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눈빛. 그때는 몰랐다. 그 눈이 앞으로 ‘눈’을 이야기하게 될 줄은.
책 제목은 '명화 속 눈 이야기'. 처음엔 제목이 약간의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명화에 등장하는 '눈'이라니,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싶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자마자, 이건 단순한 미술책도 아니고 의학책도 아니며, 더구나 의학적 해석을 곁들인 교양서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시선의 확장이었다.
기홍석 원장과 그의 동료 박광혁 교수는 모두 의사다. 한 명은 안과, 다른 한 명은 내과. 전공의 길을 걸으며 진료실에서 수많은 '눈'을 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미술관에서 명화를 보며 ‘눈’으로 읽은 것들은 우리가 놓치고 있던 감정과 질환, 삶의 흔적이었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속 카론의 돌출된 눈은, 단순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갑상선 질환의 전형적 증상일 수 있다고 한다. 고흐가 황색을 유독 사랑했던 이유도 단순한 취향이나 상징이 아니라 황시증, 즉 색을 왜곡해 보는 시각적 이상 때문일 수 있다는 분석은 꽤 설득력 있었다. 모네의 흐릿한 <수련> 역시 백내장을 앓던 노화된 눈의 시선에서 피어난 이미지일 수 있다는 설명은, 예술이 단지 의도를 담는 행위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리는' 행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책의 구성은 명확하다. ‘작품 속 눈’과 ‘화가의 눈’. 감상자의 눈과 창작자의 눈이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고 또 어긋나는지를 풀어낸다. 각 장은 한 작품을 사례로 시작하고, 병명이나 의학적 설명이 이어지며, 결국 다시 작품 감상으로 돌아온다. 복잡할 법도 한데, 꽤 부드럽게 읽힌다. 어려운 의학 용어도 최대한 쉽게 풀어냈고, 그림을 보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병의 증상과 감정, 삶이 연결된다.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해석은 정답이 아니다’라는 저자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이 책이 ‘진단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명화를 병리학적으로 해석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예술의 감상을 확장하는 하나의 제안일 뿐이다. 결국 그들이 강조하는 건, 예술을 감상할 때 자기만의 렌즈를 가지라는 것. 그게 설사 의학적이든, 철학적이든, 혹은 사적인 감정이든 말이다.
기홍석. 고등학교 시절 내게는 말수가 적고, 때로는 어딘가 '멀리' 바라보는 듯한 인상이던 친구였다. 세월이 흘러, 그가 눈을 통해 세상을 읽고, 예술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울림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오래전에 봤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내 안에도 조금은 다른 시선이 자란 것을 느꼈다. 그림을 보는 일이 이렇게 생물처럼 자라나는 감정일 수 있다는 걸, 친구 덕분에 다시 배웠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추천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림이 뭔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 혹은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을 때, 이 책은 당신의 눈에 작은 돋보기를 하나 얹어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신의 오래된 친구가 언젠가 인생 후반에 와서, 이런 책을 쓸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