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57노송포럼, 황치연 교수의 강연을 듣고
고교 동창들과 매월 셋째 주 수요일 저녁마다 모이는 지적인 소모임, '57노송포럼'이 벌써 스물두 번째를 맞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주제는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데, 이번 7월 16일에는 ‘헌법’을 주제로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 먼 법정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처럼 여기는 것이 헌법 아니었던가?
이번 제목은 <전 방위(全方位) 생활규범으로서 헌법 이야기>였다.
강연자는 헌법학자이자 헌법재판소에서 20년 넘게 헌법연구관으로 활약한 홍익대 법대의 황치연 교수였다. 그는 혁명을 주제로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황치연 교수는 늘 친구들의 법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 우리들의 지성을 높여주는 친구였다.
헌법이라고 하면 흔히들 어렵고 멀게 느낀다. 그런데 포럼을 이끌고 있고 같은 법학도인 곽세열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헌법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은 헌법 속에 있고, 헌법은 우리 삶 속에서 작동한다. ‘일상의 규범’으로서 헌법을 이야기한 황치연 교수의 강의는, 과거 법조인을 대상으로 하던 무거운 강연과 달랐다. 오늘은 친구들을 위한 밤이었다.
- 헌법은 행복을 디자인한다
강연은 철학, 역사, 시학, 정치학, 그리고 우리 삶의 민낯을 넘나들었다. 헌법은 단지 법 조항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갈 틀을 짜는 ‘디자인의 원리’라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헌법학자는 행복 디자이너입니다.”
강연의 첫머리에서 황 교수는 독일 헌법재판소, 미국 연방대법원과 비교하며 대한민국 헌법재판의 질과 양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했다. 연 2천여 건의 헌법 판례가 나오며, 국민은 헌법소원을 통해 직접 헌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헌법은 ‘살아 있는 법’이다.
- 정치도, 자유도, 삶도 헌법 안에서
이날 강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유’에 대한 논의였다. 황 교수는 자유를 Freedom, Liberty, Grundrecht, 그리고 Human Rights 네 가지 차원으로 나누었다. 개인, 사회, 국가, 그리고 인류 차원의 자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완전한 자유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소수자 보호와 같이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소중합니다.”
생각할 자유, 말할 자유, 행동할 자유. 이 세 가지가 보장될 때만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를 당연시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섬세한 균형 위에서 유지되는 제도인지 새삼 느껴졌다.
그는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을 짚었다.
정치에서의 'one man, one vote' 원칙과 경제에서의 'one dollar, one vote'의 현실. 이 대조 속에서 한국적 민주주의 모델로 Kemocracy라는 표현을 제안했다. 한류 콘텐츠를 넘어, 우리의 정치문화마저 수출하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이었다. 'Minjung'이란 단어는 이미 옥스퍼드 사전에 수록되어 있고, Kemocracy가 그 뒤를 이을 전망이라는 설명에 귀가 쫑긋해졌다.
- 법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
법치주의를 설명하면서 그는 Rule of Law와 Rule by Law의 차이를 강조했다. 법이 권력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법의 지배’는 곧 ‘권력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헌법은 권력을 창출하는 틀일 뿐 아니라, 권력을 통제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 우리 삶 속의 헌법
황 교수는 강연의 마지막을, 자신의 자문 사례의 소개로 마무리했다.
치과의 양악수술에서 현금영수증을 누락한 경우 과태료 부과의 정당성, 실험용 생쥐 생산에 필요한 전기가 농업용인가 산업용인가를 따지는 문제, 중계무역과 밀수의 경계를 묻는 질문까지. 모두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결국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와 ‘책임’을 다루는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 노송포럼이라는 이름의 무게
스무 명 남짓한 친구들이 매달 모여,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시점에서 이 넓은 세계를 다시 배우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기 위해 ‘지식’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원했다. 지혜 혹은 이해, 그것은 우리가 나눈 헌법 이야기 속에도 깃들어 있었다.
황 교수는 말했다.
“헌법은 개념 정의에서 출발하지 않고, 삶을 관통하는 가치에서 출발합니다.”
법도, 정치도, 민주주의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 친구와 함께한 지적인 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필자 주
“삶이 곧 정치요, 관계가 곧 헌법이다. 우리는 매일 작은 법정 속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때로 용서하며 살아간다. 헌법은 그 삶의 뼈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