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추억
학창 시절의 도서관은 어딘가 낡고 투박했지만, 그곳엔 종이 냄새보다 더 깊은 꿈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세상을 알고 싶은 마음을 품은 학생들은 나무 책장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 다녀야만 했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 바람처럼 넘겨지는 책장 소리, 오래된 마루 바닥이 발밑에서 삐걱이며 내던 작은 떨림까지... 모든 것이 조용하였고 따뜻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지방 도시의 시립 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키보다 높은 책장 앞에 서면, 발끝을 세워야 겨우 제목을 읽을 수 있었다. 누렇게 변한 종이와 손때 묻은 표지들, 카드 대출대에 이름을 적을 때의 작은 떨림까지. 도서관은 내게 늘, 설렘의 장소였다.
하지만 1980년대 초, 대학 시절의 도서관은 순수하게 책만 읽는 공간은 아니었다.
공부를 핑계 삼아 조용히 데이트를 즐기는 학생들. 족보 문제집이나 원서를 펼쳐놓고 눈짓으로 웃으며 작은 쪽지를 주고받던 그들은 지방 출신 고학생의 질투심을 유발했다.
반독재 시위 때는 캠퍼스가 최루탄 냄새로 가득 차서 도서관으로 피신가기도 했다. 소위 짭새라 불리던 사복 경찰들이 데모 가담자를 찾으러 잠복해 있기도 해서 옆자리에 앉은 이가 학생인지 짭새인지 몰랐다.
그래도 "도서관 간다"는 말만으로 부모님에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고교 시절이 좋았다.
친구를 만나든, 몰래 짝사랑을 훔쳐보러 가든, 도서관은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도서관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가 명당자리였다. 아침 일찍부터 치열한 자리 경쟁이 벌어졌고, 학교가 가까운 학생은 친구 자리까지 잡아주느라 애를 먹었다.
늘 담요를 둘둘 감고 하루 종일 공부하던 어떤 친구는, 3학년이 되자 전교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조용한 끈기와 작은 담요 한 장이 만들어낸 기적에 우리는 놀라며 박수를 보냈다.
돈이 넉넉했던 친구들은 어느 날부터 도서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들은 사설 독서실로 옮겨간 것이다.
따뜻한 난방과 조용한 환경이 보장된 그곳은, 우리 같은 학생들에겐 별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도서관은 더욱, 가난한 청춘들의 피난처였고, 탈출구였다.
시험이 다가오면 풍경은 또 달라졌다.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도서관 앞에는 이미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하얀 입김들, 손을 비벼가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떨림들.
겨울 아침은 매서웠지만, 마음만큼은 뜨거웠다.
어느 겨울방학 마지막 날, 도서관은 평소보다 더욱 붐볐다. 다들 남은 하루를 아쉬워하듯, 책상에 엎드리거나 문제집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창밖에는 소복이 눈이 쌓이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평소 구석자리를 포기하고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이어진 발자국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시간이 저렇게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오늘은 방학 마지막 날로, 운영을 조기 종료합니다.'
도서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안내 방송.
조용히 가방을 싸는 손길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소리들. 모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섰지만, 이상하게도 슬프지는 않았다.
이 겨울이 지나도 우리는 또 다른 계절을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대학 시절, 도서관 지하 열람실에서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누군가 휴게실 구석에서 몰래 컵라면을 끓이다 관리인에게 들킨 것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퍼져 나온 따끈한 국물 냄새.
책과 먼지 냄새만 가득하던 공간에 특유의 냄새가 퍼지자, 모두가 킥킥 웃어댔다.
관리인은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아무도 크게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국물 냄새가, 겨울 도서관의 기억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고2 11월 중순, 선배들이 예비고사(지금의 수능) 시험을 치르던 날, 두툼한 가방을 들고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향했다. 커다란 반딧불이 새겨진 도서관 안에서, '그래! 1년만 죽어라 공부하자!' 맹세했었다.
고3 시험이 끝난 어느 날 밤, 친구들과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 불빛이 희미했던 그 시절,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투명하고 깊었다.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였고, 찬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서로 말없이 별을 바라보며, 우리는 각자의 꿈을 껴안았다. 누군가는 대학을, 누군가는 먼 도시를, 누군가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미래를...
그 별빛 아래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이름도, 학년도 몰랐지만, 매일같이 그 자리에 있던 그녀는 내게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어느 가을날, 서가 사이를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순간이 있었다.
"여기 지나갈게요."
그녀가 조용히 웃으며 건넨 인사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후로 그녀는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의 여운이 내 마음 어딘가에 오래도록 남았다.
도서관은 그렇게 책과 꿈과 사랑이 뒤섞인 작은 세계였다.
누구는 미래를 위해, 누구는 친구를 위해, 누구는 사랑을 위해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모두는 나름의 이유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요즘은 모든 정보가 손끝에 닿는 세상이 되었지만,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
느릿하게 책장을 넘기던 손끝의 감촉,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한 막연한 설렘,
줄을 서며 기다리던 겨울 아침의 공기마저...
가방 하나, 꿈 하나.
우리는 그렇게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고,
삶을 조금씩, 조금씩, 키워갔다.
*이미지: 네이버 밴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