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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경은 내가 선택한다

타인의 시선과 마주한 어느 새벽의 자각

by 글사랑이 조동표


새벽 네 시, 꿈에서 깨어났다. 어둠은 깊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 방금 전까지 꿨던 꿈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꿈속에서 임원이 되어 축하를 받으며 나만의 방을 얻었다. 넓고 단정한, 이른바 '좋은 방'. 그것은 성공과 인정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 방 위에는 늘 모시던 회장님이 있었다. 그는 몸이 불편해 보였고,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소변이 잘 나오지 않네.” 나는 그를 부축해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다소 위험해 보였지만, 그를 안심시키며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이동이 아니었다. 책임감과 관계, 인간적인 연민이 섞인 짧지만 깊은 여정이었다.


내려간 홀에서는 축하연이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화려한 음식들, 모두가 나를 중심으로 모인 듯한 그 자리. 나는 중심에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립된 기분이 들었다. 축하와 환영의 순간이었지만, 낯선 긴장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였다. 원탁에 앉아 식사하던 어떤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채 이렇게 말했다.

“안경을 바꾸는 게 좋겠네.”


그는 단순히 물건을 바꾸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히 나의 '시선'을 바꾸라는 지시였고, 나의 '방식'을 교정하겠다는 충고였다. 나는 단호하게 항의했다. “왜 남의 안경을, 남의 시선을 바꾸라 하십니까?”

그의 뿔테 너머에서, 나는 오만함을 보았다.


내 안경은 금속테였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해 온,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 준 도구.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그것이 낡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경은 내가 걸어온 길과 경험,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순간 나는 분노했다. 함께 있던 몇몇 사람들은 내게 다가와 “그가 말이 좀 심했네”라며 위로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파티장을 나와 먼 길을 걸어가던 중, 본사에서 온 오너와 그 일행들이 미소를 보이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들에게도 외쳤다.

“왜 내 안경을 바꾸라고 하나요?”


그들은 타 기업의 문화를 간섭하는 말은 무시하라며 나를 지나쳤고, 마치 ‘그런 일 가지고 뭘 그리 예민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밀려온 자각이었고, 자존과 타협 사이에서의 분투였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시선과 기대, 기준 속에 살아간다. 때로는 조직이, 때로는 타인의 말이 우리의 시선을 바꾸려 한다.


“그렇게 보는 건 좀 구식이에요.”

“지금 시대에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 생각은 좀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말은 종종 '도움'이나 '조언'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규격화'의 언어일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안경을 쓰고 있는가?"


내가 안경을 바꿀 때는, 타인의 말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순간이어야 한다. 나의 시선은 내가 살아온 시간이며,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새벽의 방 안에서, 나는 손을 더듬어 내 안경을 찾아내고 만져보았다. 여전히 금속테, 여전한 내 시선.


세상은 바뀌고, 사람은 오고 가지만, 나는 내가 본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계속 바라볼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외롭고 불편하더라도, 그 시선만은 나에게 진실하리라.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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