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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못을 품은 산

백두산 천지(天池)의 거울 앞에서

by 글사랑이 조동표

하늘의 못을 품은 산

- 천지(天池)의 거울 앞에서


1화: 천지삐까리의 행운

- 천지에 물들다


"왜 백두산이냐 하면, 천지는 백 번 가야 겨우 두 번 볼 수 있으니까 백두산이야!"

그 농담을 들으며 반신반의했지만, 어쨌든 이번엔 운이 너무 좋았다.

*참고: 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 하얀 머리 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 길고 하얀 산)으로 부른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걸치고 있는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중국 쪽에서는 서파(西坡)와 북파(北坡)로 접근한다. 현실적으로 통일이 되기 전까지 북한 쪽에서 접근하기는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다.

서파는 트레킹 하듯 백두산 풍경을 감상하며 오르는 운치가 매력이고, 북파는 차량으로 편리하게 이동하는 접근성이 좋다.


서파로 올라간 첫날은 짙은 안개를 비집고 신비로운 자태의 천지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짧은 순간 하나로, 3박 4일의 여정은 충분했다.


북파로 오른 둘째 날은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아예 빗장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곱고 웅장한 용태를 마음껏 뽐내주었다.


- 서파(西坡), 1,442 계단과 금강협곡


백두산 서파.

해발 1700미터의 고산지대에서 시작하여 1442개의 계단이 이어졌다.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우리는 묵묵히 걸어 올랐다.

중국인 남자들의 담배 냄새 섞인 가쁜 숨이 거슬렸지만, 내 호흡은 천천히 천지를 향하고 있었다.

1000 계단 근처에서는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10칸씩 늘어나는 계단 숫자를 세어보며 정상에 도착하자, 안개 사이로 천지가 잠시 그 얼굴을 내밀었다.

밀집한 등반객들은 환호했고, 순간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장면 하나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스쳤고 여운을 만끽했다.

2470m에서 어린이도 인증샷
서파의 왼쪽 모습과 사진 찍는 커플
힘든 오르막길. 가마 타고 오르면 편도 9만원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지였다!

안개와 구름 사이로 보일락 말락 들락날락거리던 천지호(天池湖)는 마치 김이 피어오르는 거대한 솥단지를 방불케 했다.

흐린 천지는 오히려 신비감을 자아낸다.

하산 후, 차로 이동한 금강대협곡은 서파의 또 다른 절경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을 닮은 V자형 계곡, 바위틈을 타고 흐르는 냉기, 그리고 1.8km의 산책로를 따라 걷는 발끝이 시원했다.

이 협곡은 백두산의 거친 숨결이 지나간 자국처럼 웅장하고 고요했다.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로 이어진 계곡에서 즐긴 래프팅 체험.

속도보다는 풍경과 물소리, 대자연 속에서 맑은 물 위에 유유히 떠내려가는 그 느낌이 잊히지 않는다.

급경사 물살에 옷이 젖었지만, 마음은 촉촉해졌다고나 할까?


- 북파(北坡), 천문봉에서 본 천지와 장백폭포


새벽 4시 반, 기상.

북파로 향하는 버스는 기나긴 자작나무 군락 숲을 가로질렀고, 11인승 봉고차로 갈아타고 천문봉 정상까지 올라가는 구절양장길은 고도에 숨이 가빴다. 능숙한 운전수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커브길을 기술적으로 운행했다. 차창 너머 보이는 너르디너른 백두삼림과 깎아지른 절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윽고 정상 부근 정류장에 도착. 기나긴 장사진을 뚫고 정상에 오른 그 순간, 하얀 뭉게구름 밑으로 천지가 그 수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숨이 멎었다.

쪽빛 푸른 호수는 아름답기보다 숭고했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천지 사진

셔터를 누르면 모든 화면이 예술사진이었다.

서파보다 접근성이 좋으니 하루에 3만 8 천명씩이나 방문한다고 한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사진 찍을 틈을 찾아내느라 옥신각신에 언쟁이 난무하고...

육탄공격으로 틈을 비집고서 간신히 셔터를 눌러댔다.

왼쪽 사진 윗쪽에 실선이 보이는 쪽이 동파(東坡)로 북한 영토. 북한쪽에서 천지로 내려가는 길을 낸 곳이며 이 길을 내려간 문재인 대통령이 천지물에 직접 손을 담갔다고 한다.

벅찬 감동을 안고 내려온 길, 이번에는 장백폭포를 만났다.

천지에서 빠져나온 청정한 물이 절벽을 타고 떨어지며 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그 물이 모여드는 물길 옆 유황온천지대는

자연의 약속처럼 너무나 따뜻했다.

온천에 반숙한 달걀 한 알로 허기를 달랬다.

장백폭포로 향하는 인파
장백폭포
신비한 유황온천지대
유황온천은 기묘한 색깔을 만들었다.
장백폭포의 깨끗한 물줄기

- 백두산 자락의 식탁


패키지여행 내내 식사는 기대 이상이었다.

단체식, 옵션식 없는 실명제 식당. 이름값도 있고, 특색 있는 식당들에서 제대로 된 밥상차림을 받았다.

중국 특유의 원탁 식사와 전통주

연변자치주의 풍부한 농작물과 산채를 곁들인 콩국수와 비빔밥, 만두, 산나물 돌솥밥, 송이버섯 얹은 삼겹살과 항정살, 무한리필 양꼬치... 거기에 중국 전통 백주(白酒)를 곁들이니 이건 그냥 먹는 게 아니라, 존중받으며 ‘대접받는’ 식사였다.

연변 조선족 식단은 한국의 밥상 그대로였다.

삼겹살과 항정살 송이버섯으로 플렉스
53도의 중국술과 송이버섯

- 마지막 날의 그림자: 4시간 쇼핑


그러나 여행의 끝자락,

침향 2시간, 라텍스 1시간 반, 농협시장 30분의 총 4시간 쇼핑 일정은 아쉬움을 남겼다.


‘건강을 위한다’는 말은 이제 마케팅 수사가 되었고, 진심보다 판매 의지가 먼저인 분위기.

여행자가 소비자가 되는 순간, 감동은 순식간에 증발한다.


우리는 자유로운 여행자이지, 인해전술 속에서 강매를 설득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동포의 가슴에 못을 박지는 말자.


- 다음엔 이렇게


패키지여행은 “노옵션, 노쇼핑”이 정답이다.

어차피 그 돈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정직한 일정과 좋은 숙소, 좋은 식사,

그리고 진짜 자연을 보여주면 된다.


백두산은, 그리고 천지는, 내게 그 푸른 얼굴을 보여줬다.

그것 하나면, 나는 충분했다.

거대한 백두산 광고판을 배경으로 한 컷

다음엔 10월의 백두산을 보고 싶다.

단풍이 물들고, 바람이 맑아지는 계절.

다시 한번 천지삐까리의 순간을 꿈꾸며,

또 떠나고 싶다.


2화: 천지에서 온 편지

- 백두산 기행과 기술 문명의 이면


백두산을 향해 가는 여정.

하늘 아래 첫 번째 산이라 불리는 그곳을 찾기까지, 나는 시골과 도시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술과 인간 사이의 어색한 동행을 목격했다.


이도백하(二道白河)는 백두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조그만 마을이다. 여기서 백두산으로 출발한다. 그런데 이곳이 놀랍도록 ‘미래적’이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꾸며놓은 거리와 5D 시네마 극장.

연길 시내의 호텔문을 여는 얼굴 자동인식 AI 시스템. 호텔 방의 디지털 거울과 첨단 비데. 로비에는 룸서비스 로봇도 있다.

첨단 이미지의 건물
거리 풍경
AI 얼굴인식 장치와 디지털 거울

온천욕장에는 첨단 과학의 워터 테크놀로지가 힐링과 결합되어 심신을 쾌적하게 만든다.

호텔 주차장엔 중국산 전기차가 즐비하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변방이 더 이상 기술의 변두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는 중국차가 대세. 한국 차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우리나라의 현실이 씁쓸하게 떠올랐다.

이공계 대학을 가지 않고 의대를 향해 몰려가는 나라. 정작 필요한 기술 분야는 외면받고, 피부미용과 개원이라는 좁은 미래에 매몰된 청춘들. 이 땅에서 과학의 진보는 과연 누가 책임지는가? 이도백하와 연길에서 본 자동 로봇과 AI 기술, 5D 영화는, 우리의 이공계 현실에 대하여 나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얼굴 인식 시스템과 로봇

이번 여행의 호텔과 음식은 대만족이었다. 퓨어랜드호텔의 첨단 온천욕, 매일 바뀌는 지역 특산요리. 이 부분은 패키지여행의 장점이 빛을 발했다.

2023년에 개장한 첨단 온천욕장호텔

다만 옵션만은 옥에 티였다.

여행 첫날부터 시작되는 ‘옵션의 유혹’. 가이드는 말한다. 이건 꼭 해봐야 하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마사지, 래프팅, 송이버섯 체험, 5D 영상관람... 거기다 팁까지 포함하니 순식간에 훌쩍 30만 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한다. 나 혼자 옵션에서 빠지고 혼자서 뭐를 할 것인가? 분위기상 다 같이 우르르 참여하는 부화뇌동의 분위기. 노련한 가이드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로 여행객의 감정선을 건드리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가장 아쉬웠던 것이 쇼핑 시간이었다. 침향(沈香) 체험이라며 무려 두 시간을 강제로 앉혀놓고 수백만 원 대의 제품을 권한다. "부모님 생각나지 않으세요?" "건강이 최고예요" "간이 나빠보여요"라며, 정서적 압박이 뒤따른다. 가이드의 눈빛은 애절하고 판매원들은 인해전술로 달라붙어 거의 협박하는 분위기 창출.

이건 설득이 아니라 감정의 앵벌이야!


게다가 라텍스 침구에 농산물 쇼핑까지 더해지니 네 시간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럴 바엔 차라리 혼자 왔으면...”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가족 여행, 효도 여행이라는 미명 아래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하게 되는 게 또 사람 마음이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밤, 반성회를 열었다.

천지의 거센 바람, 계단을 오르며 흘린 땀, 그리고 중국의 기술 발전에 대한 충격. 그 모든 것을 떠올리다, 아내가 말했다.

“노옵션, 노쇼핑. 그게 진짜 여행이야.”


앞으로는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한 달 이내 출발 확정된 긴급모객 상품을 눈여겨보자고 다짐했다. 자신의 일정을 한 달쯤 앞서 알고 있는 중년의 여유라면, 즉시 결심하고 실행하는 민첩함도 갖추어야 하니까.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온 편지는 그저 풍경의 감동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로, 여행의 방식, 기술의 속도,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성찰이었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 그리고 두만강
두만강 건너 역이 보이고 구호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연변박물관
연변박물관 내부의 전쟁 관련 전시물
서파 보다는 북파쪽 해발이 높다.
깨끗한 쓰레기통과 화장실.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이며 스쾃 토일렛이란 영어 표기가 이채롭다.
시인 윤동주의 고향 용정
선구자 노래에 등장하는 일송정 푸른 솔과 해란강
연변대학교와 불야성 거리
어디서나 눈에 띄는 백두산 사진
고산지대 야생화
서파 입장 티킷. QR코드로 인적사항을 체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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