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가 최정연을 만나다
《궁중의 색, 명화의 숨: 최정연을 만나다》
인사동 골목을 지나 갤러리 문을 밀자, 비단처럼 차분한 공기가 먼저 다가왔다. 벽에는 눈에 익은 장면과 낯선 질감이 겹쳐 있었다. 서양 명화의 구성이 보이는데, 색은 한국 궁중화의 빛으로 반짝인다. 그 “겹침”의 주인공은 최정연. 2024년 여름, 갤러리인사아트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 제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 전통 궁중 회화, 명화를 만나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먼저 재료가 말을 건다. 캔버스 대신 비단, 유화 대신 진채(전통 광물 안료 채색). 표면은 매끈한데 층은 깊다. 몇 번이고 올린 얇은 색들이 겹겹이 숨을 쉬며, 서양 명화의 선과 원근을 한국 궁중 회화의 농담으로 번역한다. 작가는 서양화를 공부하다가 동양화에서 ‘기운생동’을 느끼고 전공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화면에는 두 언어가 다투지 않고, 마치 한 문장처럼 이어진다.
가장 오래 시선을 붙든 것은 〈자화상〉이었다. 비단 위, 진채로 그린 여신이 일월오봉도를 그리고 있다. 한복 대신 명품 패턴의 드레스, 옆에서는 천사가 유튜브 골드 버튼을 든다. 욕망과 전통, 장인의 공력과 대중의 플랫폼이 한 화면에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 “명화를 보며 배우고, 익숙한 것을 통해 나의 인생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는 오마주를 기술 훈련의 기록이자 자기 서사의 도구로 삼는다.
지하 전시장으로 내려가면 꽃이 핀다. 정물의 정적이 아니라, 온실의 호흡처럼 습도와 향기가 느껴지는 장면들. 비단결 위로 색이 수천 번 들고 난 끝에야 얻을 수 있는 투명한 빛, 그 과정의 시간감이 화면 전체에 은은히 번진다. 꽃이 모티프가 아니라 호흡법이 되는 순간이다.
작품 제목들에도 그의 방법이 스며 있다. <1700년대 어느 날>, 〈1750년 어느 날〉, 〈1799년 어느 날〉같은 연작은 특정 시대의 이미지를 소환하면서도, 그날의 공기를 한국적 색으로 다시 읽는다. 서양 미술사의 한 장면을 ‘그날’로 호출해 와 비단 위에서 재번역하는 방식. 낯익은 장면이 전혀 다른 온도와 예법을 얻는다.
한 저널지의 평처럼, 그는 궁중 회화의 차용·응용을 통해 독특한 세계를 만든다. 명화 속 인물과 장면을 오마주하지만 단순 복제가 아니라 개인사적 메시지를 주입해 새롭게 읽히게 한다. 그래서 화면은 미술사 수업의 판화가 아니라, 오늘의 일기장처럼 살아 있다.
나는 그의 그림을 ‘번역된 명화’라고 부르고 싶다. 번역은 옮겨 적기가 아니라, 원문이 가진 리듬을 다른 언어의 문법으로 다시 숨 쉬게 하는 일이다. 최정연의 화면에서 서양 명화의 구도와 시선은 남되, 광물 안료의 깊이, 비단의 번짐, 궁중 도상의 상징성이 그 리듬을 새로 작곡한다.
일월오봉도의 적·청·황이 명화의 음영을 끌어안고, 유튜브 골드 버튼 같은 동시대 오브제가 왕실의 병풍 곁에서 엉뚱하게도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익숙함과 낯섦이 맞물릴 때 발생하는 미묘한 전율, 그게 이 작업의 감정선이다.
전시장의 동선도 은근한 이야기 같다. 1층에서는 자전적 서사 - 오만했던 유년, 슬럼프, ‘Soul Monster’라는 자아각성 - 가 펼쳐지고, 아래층에선 꽃과 인물로 호흡이 잦아든다. 마치 큰 물결 다음의 잔잔한 여울처럼. 그림이 화가를 위로하고, 화가가 관객을 위로하는 순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영혼을 불어넣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의 진술이 회랑을 따라 잔향처럼 남는다.
전시명은 선언처럼 간결하다. “명화를 만나다(Meet Masterpieces)”. 하지만 실은 ‘만남’ 이상의 일이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공예적 노동과 디지털 문화, 사적인 욕망과 공적인 상징이 한 화면에서 협상하는 과정이다. 번역의 예술, 혼합의 예의. 그리고 그 예의가 만들어내는 오늘의 아름다움.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오래된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전통은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새로 숨 쉬는 방식이라고. 최정연의 비단 화면은 그 증거였다. 명화가 우리에게 낯선 교과서가 아니라, 한국적 질감으로 다시 태어나는 현장.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는 “옛것과 새것”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남는 건, 그 둘이 함께 빚어낸 한 장의 오늘뿐이다.
- 참고한 전시·자료
갤러리인사아트 개인전 안내(2024.07.31–08.13)와 전시 개요.
전시 리뷰: 비단·진채, 자화상(일월오봉도·골드버튼·명품 패턴), ‘Soul Monster’ 서사, 연작 제목(1750/1799/1892년 어느 날) 등.
비평 메모: 궁중 회화 차용·응용과 개인사 메시지의 결합.
전시 일정 아카이브(네오룩).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