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의 끝에서, 인간을 다시 묻다

57노송포럼 방극준 교수 강연을 듣고

by 글사랑이 조동표

디지털의 끝에서, 인간을 다시 묻다

- 57노송포럼 방극준 교수 강연을 듣고


매월 셋째 주 수요일 저녁, 고교 동기들이 모여 인문학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57노송포럼은 날로 그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강사로 초빙된 동기와 수강생인 친구들이 뒤섞여 간단히 도시락을 나눠먹고 정담을 나누며 진지한 자세로 포럼에 임한다.


동기들 중에서 숨고(숨은 고수)를 찾아내는 일이 쉽진 않지만, 매월 새로운 주제를 듣고 토론하는 57노송포럼이야말로 진정한 지성의 광장이다.


작년 1월부터 시작한 포럼에서는 벌써 20명을 훌쩍 뛰어넘는 전문가들이 각 분야의 강사로 나섰다. 그만큼 수준 높은 친구들이 많아서 자랑스럽다.


2025년 10월 15일 57노송포럼은 인덕대 방송영상미디어학과 방극준 교수를 초대하여 '방송 미디어 분류 및 표준의 변화'를 주제로 강의를 들었다.


아래는 그의 강의 내용과 열띤 토론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이다.


방극준 교수를 소개하는 57노송포럼 회장 곽세열 변호사. 숨고를 찾아내는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1. 안테나에서 OTT까지, 전파의 길 위에 선 인간


텔레비전은 언제나 시대의 거울이었다.

1927년 우리나라에 KBS 라디오가 울려 퍼진 이후, 1956년 흑백 TV, 1980년 컬러방송, 2005년 DMB, 그리고 2017년 지상파 UHD 방송까지, 방송은 기술의 진화와 함께 우리의 일상을 비추어왔다.


57노송포럼에서 방극준 교수(인덕대학교 방송영상미디어학과)는 ‘방송의 디지털화’를 단순한 기술 변천이 아니라 “문명의 전환점”이라 정의했다.


인덕대학교 방송영상미디어학과 방극준 교수(전자공학과 전공)

그의 말처럼, 디지털 전환은 전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다.

흑백의 신호가 칼라로, 아날로그의 파동이 디지털로 바뀌는 동안 우리는 기술의 진보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를 재구성해온 역사였다.


2. 방송법의 틀을 벗어난 세계


1964년 제정된 방송법은 한때 ‘규제의 틀’이었다. 그 법 안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케이블과 위성방송이 질서 있게 자리했다.


그러나 오늘날 OTT(Over-The-Top media service: 여기서 Top은 TV에 연결된 셋톱박스를 의미.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서비스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포함)의 세계는 그 틀을 벗어나버렸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방송법의 관리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의 망을 빌려 쓰지만, 정작 한국의 콘텐츠는 그들의 알고리즘 안에 갇혀 있다.

지상파는 직접 송신하고, 종편은 PP를 거치며, IPTV는 셋톱박스를 통해 들어온다.

OTT는 그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터넷의 파도를 타고 넘어온다.


방극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우리는 이미 다채널의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다양성은 역설적으로 ‘주권 없는 미디어 현실’을 보여준다.

콘텐츠는 넘쳐나지만, 이야기의 주인은 사라진 시대.

그것이 디지털 미디어의 또 다른 그림자다.



3. 완벽해진 신호, 사라진 온기


기술적으로 보면 디지털은 완벽하다.

아날로그의 잡음과 그림자는 사라졌고,

제작단계의 화질이 손실 없이 100%로 전달된다.

SD에서 UHD, 그리고 8K까지, 인간의 시야 한계(약 120도, 60 화소)를 모두 채웠다.

이론상 16K도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인간의 눈이 감당할 수 없는 세계다.

TV의 기술적 진화는 이미 ‘완성의 끝’에 다다른 셈이다.


그러나 방송의 본질은 여전히 ‘인간의 감도’에 있다.

아날로그는 잡음을 제거하지 못했지만 그 노이즈 속에는 온기가 있었다.

디지털은 완벽하지만, 차갑다.

기억의 노이즈를 지워버린 세상은 더 선명하지만, 덜 인간적이다.



4. 자유의 상징에서 종속의 상징으로


1980년, 전두환 정권 시절 통금 해제와 함께 ‘칼라방송’이 시작되던 순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때의 컬러는 자유의 색이었다.

흑백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각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해방의 기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초고화질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상파 UHD 방송을 직접 수신하는 가구는 2%에 불과하고, 98%는 유료방송이나 OTT 플랫폼에 의존한다는 보고도 있다.

플랫폼은 늘어났지만, 주체는 사라졌다.

이제 칼라는 자유가 아니라 ‘자율의 종속’을 상징한다.

디지털의 선명함 뒤에는, 보이지 않는 통제의 손이 더 깊게 뻗어 있다.



5. 의미의 해상도를 복원하라


우리가 지금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기술이 인간을 비추는가, 아니면 인간이 기술 속에서 사라지는가?”


UHD, 8K, 16K로 이어지는 해상도의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의 해상도’를 복원하는 일이다.

기술은 인간의 눈을 만족시켰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귀와 마음으로 완성된다.


잡음 없는 세상은 아름답지만, 그만큼 차갑다.

디지털의 끝에서 다시 인간을 묻는 일, 그것이 방송의 새로운 출발점일 것이다.



6. 에필로그: 전파는 여전히 인간을 향한다


포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과 버스 안의 사람들은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방송’은 여전히 그들의 손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흔들리는 화면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 신호가 웃음이든, 음악이든, 위로든, 결국 인간의 마음이 전파를 타고 흐르는 한 방송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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