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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제주 오름 여행기 제7편

까도 까도 다시 나오는 제주라는 양파

by 글사랑이 조동표

마지막 날의 제주 아침은 유난히 맑았다.

밤새 비가 지나간 섬은 먼지 한 톨 없이 말간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 뜨자마자 짐부터 챙겼다. 일주일간 눌러놓았던 캐리어를 정리하고 차에 실었다. 어딘가 아쉽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여행의 온도를 더 높였다.


- 사려니숲길, 마음에도 피톤치드가 스며들다


우리는 사려니숲길 입구에 주차하고 커피로 하루를 열었다.

비에 씻긴 길은 적당히 젖어 있었고, 식물들은 갓 태어난 듯 생생하게 빛났다. 삼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는 폐가 아니라 마음속까지 파고들었다.



길을 걸으며 나눈 대화는 가벼웠지만 주제는 묵직했다.

재테크, 자녀의 진로, 노후의 시간표... 그리고 60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각자의 농담 섞인 진담들.



비가 온 뒤라 오솔길 대신 넓은 중심길로 걸었다. 너무 멀리 가진 않았다. 돌아갈 수 있는 시간만큼만 걸었다. 아쉬움이 남을 만큼만.



- 교래에서 나눈 위로 같은 점심


점심은 ‘식당 교래’라는 곳에서 먹었다.

청국장, 솥밥, 갈치구이, 고등어구이.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밥상이었다. 청국장은 짜지 않아 향이 살아 있었고, 구이 생선은 적당히 씹기 좋았다. 여행의 끝에 딱 어울리는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일부 친구들은 먼저 공항으로, 나머지는 이호테우해변으로 향했다.

헤어짐은 늘 쿨하지 못하면서 괜히 쿨한 척했다.


- 이호테우해변: 배나무의 기억과 뗏목의 노래



해변의 이름은 보통 바람에서 온다. 혹은 파도, 모래, 마을의 얼굴에서 온다. 그런데 제주 이호의 해변 이름은 나무와 배(舟)에서 왔다. 땅과 바다가 한 문장으로 이어진 이름이다.


이호(梨湖)는 배나무 ‘이(梨)’에, 호수 ‘호(湖)’. 한때 이 마을엔 배나무가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봄이면 하얀 배꽃이 마을을 채우고, 바람이 불면 꽃잎은 마치 파도처럼 일렁였다. 땅에도 물결이 있었던 것이다.


테우(Teu)는 통나무 여러 개를 엮어 만든 제주식 뗏목을 일컫는다. 당연히 엔진도, 거창한 키도 없다. 바람을 읽고, 물살을 짚어, 노 하나로 바다와 균형을 맞추어 나아간다.

테우는 달리는 배가 아니라 흘러가는 배다.

바다와 싸우지 않고, 바다의 허락을 받아 움직인다.


테우는 통나무 뗏목이다.

그러니 이호테우해변이라는 이름은, 배나무가 흔들리던 마을 앞바다에서, 테우가 파도와 대화를 나누던 자리라는 뜻이다.


지금도 해변엔 두 등대가 서 있다.

붉은 한 마리, 흰 말 한 마리.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지만 달리지 않는다. 서로의 존재로 방향을 알려줄 뿐이다. 테우가 그러했듯, 빨리 가려하지 않고 잘 가기 위해 존재한다.


붉은 말, 흰 말.

여기 바다는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파도는 서두르지 않으나 멈추지도 않는다.

느린 것이 아니라, 자기 속도가 있는 것이다.

테우가 그랬고, 배나무가 그랬다.

봄을 서두르지도, 결실을 앞당기지도 않았다.

피어야 할 때 피었고, 떠 있어야 할 때 떠 있었던 것이다.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도 많다.

가만히 해변에 서 있으면 엔진 소리 대신 삶의 리듬이 들린다.

나아가려고 애쓰기보다 흔들림 속에서 균형을 찾는 법.

바람 방향을 거스르기보다 바람의 마음을 읽는 법.

속도보다 방향이 먼저임을 아는 법.



이호테우의 이름 속엔 그런 삶의 방법이 숨어 있다.

배꽃이 바람에 지면 바다가 흔들리고, 테우가 흔들리면 사람의 마음도 잔잔히 출렁이는 곳.


이곳에 서면 알게 된다.

인생은 거대한 배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

잘 묶인 통나무 몇 개면 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그 위에 올라 바람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어디든 갈 준비가 된 존재라는 것.



- 듀포레 카페에서, 비행기를 올려다보다


나는 밤 비행기라 여유가 있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제주 시내로 들어가 공항 근처 ‘듀포레’ 카페로 향했다.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올려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멀리서 배가 느릿하게 물살을 가르고, 갈매기는 끼룩끼룩 날고 있었으며, 낚시꾼의 실루엣은 점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와 배

떠나는 자가 느끼는 고독과 설렘, 그 미묘한 틈에 내가 서 있었다.


- 제주가 남긴 마지막 풍경, ‘파랑도 횟집’


친구 P가 자신 있게 소개한 마지막 코스는 공항 근처 ‘파랑도 횟집’이었다.

참돔 한 상차림은 ‘푸짐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두툼한 회, 쯔케다시(회 요리에서 나오는 전채 요리로 주문과 상관없이 자동으로 나옴), 머리조림, 보양식 지리(맑게 끓인 국물 요리). 어느 하나 허투루가 없었다.



모두가 입을 모았다.

“이렇게 신선한 회와 보양식은 처음이야.”


참돔 한 상 차림

다음에 가족과 꼭 와야겠다고 마음에 적었다.

P는 또 넉넉한 친구답게 끝내 계산까지 해버렸다. 내가 우기다 졌다. 미안했고, 고마웠고, 마음이 복작거렸다.


- 비행기의 잠, 60대의 답


6박 7일.

전반은 아내와 함께한 행복,

후반은 친구들과 함께한 우정.


골프와 낚시, 재테크 이야기에 끼어 나는 자꾸 “60대의 시간”을 떠올렸다.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떤 속도로 살 것인가.


비행기에서 잠들었다 눈을 뜨니 김포공항이었다.

제주는 여전히 멀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그리워하고 있었다.


- 까도 까도 나오는 제주라는 양파


제주는 양파 같다.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온다.

한 번 가보고 다 아는 곳 같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아직 겉껍질만 벗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오게 된다.

다시 걸으러, 다시 먹으러, 다시 마음을 씻으러.


그리고 또 묻는다.

“다음엔 어떤 제주가 나를 부를까?”


제주올레길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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