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라는 이름의 신뢰
왜 병원에 가면 온순해질까?
- 병원이라는 이름의 신뢰
병원에 가면 사람들은 대체로 온순해진다.
목소리는 낮아지고, 말끝은 부드러워진다.
평소 같으면 그냥 흘려들었을 말에도 “네,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먼저 나온다.
젊고 어린 간호사가 설명을 해도 마찬가지다.
딸보다 훨씬 나이가 어릴지라도,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간호사님.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은 내가 아픈 몸을 들고 찾아온 곳이기 때문이다.
- 구원의 장소에서는 사람이 작아진다
몸이 아플 때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겸손해진다.
병원은 치료의 공간이기 이전에 ‘구원의 가능성’을 품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의 말은 물론이고 간호사의 안내 한마디조차 내게는 그저 사무적인 설명이 아니라 “이제 나아질 수 있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80이 넘은 노인이 20대 간호사에게도 자연스럽게 공손해진다.
나이, 지위, 경험 같은 것들은 통증 앞에서 모두 의미를 잃는다.
- 몸을 맡긴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우리 몸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 몸을 돌봐주는 이들에게 본능적으로 신뢰를 건넨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왠지 모르게 말을 조심하게 되고, 지시에 따르려 애쓰게 된다.
그 태도 자체가 이미 치료의 일부가 된다.
의사의 한마디가 실제 약보다 더 큰 안정을 주고, 간호사의 말투 하나가 통증을 덜 느끼게 만드는 순간도 있다.
이른바 플라세보 효과,
나는 그것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플러스 에버 효과.’
믿음이 몸을 조금 더 앞으로 밀어주는 힘.
- 예외는 늘 있지만
물론 병원에서도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욕설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지르는 이들.
하지만 그것은 백 명 중 한 명쯤의 이야기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픔 앞에서 스스로를 낮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몸을 맡길 때, 자연스럽게 예의를 회복한다.
병원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곳이 아니다.
사람이 다시 사람다워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픔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신뢰할 줄 아는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오늘도 병원에서는 작아진 몸 대신, 조금 더 온순해진 마음이 먼저 치료를 받는다.
*이미지: 구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