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미아 1장 4화

영업사원

by 글사랑이 조동표

강남역 미아 1장 4화

- 영업사원


입사 첫 달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회사라는 공간에 몸은 들어와 있었지만, 아직 명확한 역할은 부여되지 않았다. 그는 출근을 하고,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가끔 파트너사 학술 담당 약사가 들러 약리 기초를 설명하고 돌아갔다.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면접 때 보았던 작은 체구의 일본인 지사장이 사무실에 나타난 날, 공기는 단번에 바뀌었다. 그는 영어로 연수 계획을 설명하더니, 두꺼운 원서 몇 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고혈압, 기관지염, 녹내장. 생소한 질환에 쓰이는 약물의 기전과 부작용, 임상 데이터가 빼곡한 영어 책들이었다. 이것을 스스로 읽고 공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한국 의료보험 제도를 이해한 뒤, 내용을 정리해 일본어로 제출하라는 지시가 덧붙었다.


그는 서랍 속에서 일한사전을 꺼냈다. 동생이 공부하겠다며 사두고 방치했던 것이었는데 혹시 몰라서 들고 온 책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밤마다 자료를 보고 책을 펼쳤다. 단어 하나를 찾는데 시간이 걸렸고, 문장은 자주 막혔다. 드디어 완성된 요약서는 누가 봐도 허술했지만 기한에 맞춰 제출하긴 했다. 해냈다는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설득했던 최초의 보고서였다.


며칠 뒤, 한국인 대표가 말했다.

파트너사 영업부로 나가보라는 지시였다. 종합병원부. 업계에서는 ‘사관학교’라 불리는 조직이었다. 그는 정식 영업사원이 아니었다. 제품을 파는 대신, 설명만 담당하는 보조 역할 '디테일맨'이었다. 이른 아침, 갈색 007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발밑이 살짝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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