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미아 2장 2화

성과는 현장에 있다

by 글사랑이 조동표

소설 강남역 미아 2장 2화

- 성과는 현장에 있다


강남역 출구 계단의 공기는 늘 비슷했지만, 그날은 유난히 눅눅했다.

지하철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히며, 마치 보이지 않는 전쟁터로 밀려나듯 흩어졌다. 그는 그 흐름에 섞여 회사 쪽으로 걸었다. 오늘은 일본 본사에서 창업자 3세인 오너가 오는 날이었다.


회의실 공기는 무거웠다. 그는 담당 제품 개발에 대한 진행 상황 및 그간의 성과를 보고했다.

일본 오너는 말수가 적었지만 질문은 정확했고 목소리는 저음에 카랑카랑했다.


오너는 한국 직원들이 준비한 자료를 한 장씩 주시하다가 손을 멈췄다.

임상 진행 속도, 병원 진입 현황, 처방량.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국 책임자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었지만, 문제는 병원이었다.

신약은 논문만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약사심의위원회, 진료과 교수, 의약품정보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관행의 벽.

그 모든 것을 넘지 못하면 약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너의 질책은 길지 않았지만 날카로웠다.

“연구는 훌륭하다. 하지만 약은 연구실이 아니라 병원에서 증명된다. 현장은 어떠한가?”

그 말은 꾸짖음이었고, 동시에 명령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메모를 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움직였다.

임상연구회는 이미 가동 중이었지만, 병원에 약을 넣는 문제는 전혀 다른 전쟁이었다.

임상 데이터가 아무리 좋아도, 기존 약을 대체할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면 병원에 들어가지 못한다.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면 당연히 처방이 나오지 못한다.


그는 병원 별 약사위원회 구조를 다시 정리했다. 어느 병원에서는 어느 교수가 실질적인 키를 쥐고 있는지 파악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신약, 그것은 단순히 제품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늘 그 약의 가치, 환자에 대한 기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는 이 제품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약의 전도사가 된 것처럼, 약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꿰고 있었다.

그래야 교수들의 질문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침에는 강남역으로 출근해 회사로 갔다가, 오후에는 대학병원으로 이동했다.

흰 가운의 세계는 늘 조심스러웠다.

말 한마디, 자료 한 장이 누군가의 신뢰를 얻거나 잃게 만들었다.


신약을 설명하는 일은 단순한 발표가 아니었다.

기존 치료제와의 비교, 부작용 프로파일, 장기 투여 가능성.

그는 일본에서 넘어온 자료를 한국 의료 현실에 맞게 다시 해석해야 했다.


어느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 교수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더 많은 근거를 요구했다.

기초연구회와 임상연구회는 동시에 돌아갔다. 동물실험 데이터는 약의 작용기전을 뒷받침했고, 임상 결과는 실제 환자에게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 두 축이 함께 움직여야만 병원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초 연구 결과는 해외 학회지에 속속 실렸지만 임상연구 결과가 학회지에 실리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그는 병원을 수없이 오가며 약사위원회 안건 상정을 위해 자료를 보완했다. 진료과 설명회를 열기 위해 영업팀과 밤늦게까지 전략을 짰다. 식당 벽을 사용한 임시 스크린 앞에서 발표하고 질문을 받으며 현장의 반응을 몸으로 느꼈다. 고객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날의 반응이 처방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때론 폭탄주가 등장하고, 끝내 새벽이 되어 귀가할 때도 많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의 귀가 길은 점점 더 무거워 갔다. 설명회가 끝난 뒤 술자리를 가진 날이면, 총알택시를 찾아 돌아다녔다. 아이를 보러 귀가를 서두르던 어느 날, 음주운전의 유혹과 싸우다 좁은 밤길을 달리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그것은 한때 그의 고단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처처럼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갈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집에 돌아가면 덤덤한 아내와 어린 자녀들이 그를 맞이했다. 딸은 때때로 낯선 아저씨를 밀쳐내듯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느덧 그의 마음 한편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항상 가족의 품에 들어가는 순간은 짧았고, 그는 또 다른 강남역의 아침을 꿈꾸며 잠들곤 했다.


드디어 2년의 임상연구 결과가 통계로 정리되어 학회지에 제출되었다. 학회는 이를 신뢰할 만한 새 시도로 인정해 발표를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이 논문은 수많은 전문의에게 정확한 약의 효과를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


병원 도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학회 발표논문과 기초연구 결과는 반드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였다. 각 지방에도 우후죽순처럼 연구회가 생기고 여기저기서 설명회 요청이 쇄도하였다. 몸이 열 개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순풍에 돛 단듯한 나날이었다.


그의 노력은 회사 밖에서도 화제를 일으켰다. 경쟁사 자료가 그의 팸플릿을 그대로 모방하기까지 했고, 학술교류 행사에서는 그의 이름이 회자되었다. 전시관 부스 앞에서 전문의와 나눈 대화, 병원 설명회 자리에서 정확하게 전달된 정보, 그리고 밤늦은 식사 자리에서 이어진 논의까지, 그의 하루는 강남역 출근길만큼이나 긴 여정이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글사랑이 조동표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고, 인간다움을 찾으며,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미래의 삶에 공헌하며, 행복하게 살기.

69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6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7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