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신지 37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저는 어머니를 회고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봅니다. 지난날, 그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에 저희 4남매를 낳으시고 또 키우셨던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다시 한번 새겨 봅니다.
1970년대, 제가 학교에 다녔을 때 저와 동생 셋을 같이 키우면서 어머니가 베푸신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셋방과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이사 갈 때마다 팥죽을 끓이고 부엌에서 우셨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그때 외숙모가 어머니를 위로했던 모습도 생각이 나고요...
다들 어렵고 힘든 세월이었지만 우리는 유난히도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집 장만할 때까지 15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지요. 우리 4남매는 어머니를 따라 이삿집에 가서 철없이 놀기만 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허리띠를 불끈 졸라매고 어서 빨리 집을 장만하고자 굳게 다짐하셨을 겁니다.
다행히 어머니의 선견지명으로 저희가 인봉리에 집을 마련하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인 1977년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 집에 전화가 놓이고 TV도 놓이고 제 공부방이 생기고 마당이 있었고, 마당에는 감나무와 국화 그리고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우리가 귀여워한 '잠보'라 불렀던 강아지도 키웠지요.
골목 끝 높은 자락의 우리 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얼마나 경관이 좋았고 뿌듯하였는지 모릅니다. 홍수에 떠내려갈 위험은 전혀 없었지요. 높은 곳에 있었기에 가뭄이 들면 양동이를 들고 골목 아래로 내려가 작두물과 우물물을 퍼담아 낑낑대며 갖고 올라가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오죽 물이 귀했으면 어린 저희들까지도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만, 그 힘든 세월을 아무 말 없이 속으로 삭이며 견뎌냈을 어머니의 속마음을 이제야 헤아려 봅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화를 내거나 꾸중을 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타이르기만 하셨죠. 어머니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말썽을 부리거나 속상하게 만들었어도 화를 내신 기억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키가 크지 않으셨기에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를 머리 위에서 내려보곤 했지만, 그렇게 날로 커가는 저를 얼마나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셨는지,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엄마는 몸이 작아도 너같이 큰 아들을 낳았잖니?"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성장이 어머니께 커다란 기쁨과 뿌듯함을 선사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크지 않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아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나는 땅딸보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당시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얼굴 속에, 본인은 작아도 튼튼하고 큰 자녀들을 낳아서 기르신다는 자부심 어린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자식들은 다 건강히 성장하여 제 갈 길 찾아서 맡은 바 일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학교도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또 자녀들을 낳았고, 그 자녀들도 또 학교를 나와 일자리를 마련하였고, 이제는 다들 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살아 계셨으면 86세가 되셨을 오늘, 아버지와 함께 손을 꼭 잡고 같이 장도 보시고 여행도 떠나시고 서울에 있는 저를 만나러 오시거나 시드니에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가셨을지도 모릅니다. 장거리 여행은 어려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처럼 호주에서 조카와 동생이 와 있으면 어머니가 훨씬 더 기쁜 마음으로 맞아주고 사랑을 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먼 거리에 떠나 있을수록 자식을 더 보고 싶은 그리움이 간절하겠지요.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호주보다 더 먼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그러니 저희들의 그리움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보고 싶은 어머니,
이름 그대로 선량하고 법 없이도 사셨을 어머니, 저희들에게도 착하게 살기를 항상 강조하셨던 어머니, 그 뜻에 맞춰 저희 자녀들도 다 착하게 커 있고 성실한 삶을 살고 있고 선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인자하신 성품에 어머니의 선량한 유전자가 그대로 인식되어 각인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증거입니다.
학교생활과 사회생활로 바쁘셨을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비해 어머니의 사랑은 자상하면서 섬세하였고, 또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 주셨기에 저는 어머니가 웃던 모습과 슬퍼하던 모습, 기뻐하는 모습, 저희들을 꼭 껴안고 흐뭇해하셨던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가 태어나신 음력 1월 10일입니다. 살아 계셨으면 아침에 쇠고기 미역국을 드셨을 것이고, 저는 아침부터 어머니에게 "엄마 생일 축하해요"라고 전화를 했을 것이며, 어머니는 "그래 잘 지냈지? 너희들 덕분에 생일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구나, 아버지도 건강하시다, 너도 60 넘었으니 이제는 몸을 돌보려무나. 네 사랑스러운 아내도 많이 사랑해 주고 우리 손자 손녀들도 잘 컸으니 얼른 결혼시키거라"라고 말씀하셨을 듯도 합니다.
물론 저희 세대와 달리 요즘은 30살이 넘어서 결혼을 준비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살아 계셔서 손자손녀에게 얼른 결혼하거라,라고 하는 말씀을 한 번 더 해주신다면 착한 자녀들은 할머니 말씀을 더 깊게 받아들이고 혼인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50세가 되지도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기에 할머니가 되신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항상 곱게 치마저고리에 청색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학부형 모임에 다녀오셨거나, 졸업식 가족사진을 찍었거나 하는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40대 후반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모습들이 저의 마지막 기억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꽃다운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아니셨습니다.
섬섬옥수로 자녀들을 넷이나 키워내신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은 저희들 몸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넓고 컸을 것입니다. 하해와 같이 넓다라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저희가 어떻게 가늠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하루 종일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해 보았어요. 전주예수병원에서 인봉리 집에 모셔졌을 때의 모습을 또렷이 더듬어보면서, 호흡곤란이 온 어머니와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 한 순간들이 또렷합니다. 새벽녘까지 눈을 붙이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쫑긋해 가며 같이 숨쉬기 보조를 맞췄던 그날 밤과 희뿌연 여명이 떠오릅니다.
곧 봄이 오고 4월이 또 오겠지만 서울에서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내려가던 경부와 호남고속도로 주변,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봄날의 그 기쁨과 꽃들이 왜 제게는 가장 처연한 슬픔의 눈물로 다가왔는지요...
어머니의 사랑과 기쁨이 그리움으로 변하고 또 그것이 슬픔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저의 마음속에 있던 희로애락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점점 엷어져 가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감정이 메말라가는 나이인가 봅니다 어머니...
하지만 다시 젊은 기분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의 그 순수한 아기 같은 마음, 선량한 마음, 티 없이 맑은 마음을 그리워하며 어머니께 떳떳한 아들이 되어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이 사회에 작은 등불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께 약속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으며 아버지를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버지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는 이 불효자를 항상 책망하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요즘 문자로나마 안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 세상이 참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멀리 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를 잘 모실 수 있는 효도의 기회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친구들도 그리운 어머니 생전 모습을 다 기억하고 있고, 만나면 어머니의 정이 듬뿍 넘치는 말씀 하나하나를 반추하며 그리워합니다. 그만큼 친구들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아직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요즘에는 꿈에 잘 보이지 않으시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매우 서운합니다. 오늘 밤에라도 제 꿈에 나타나셔서 저에게 정겨운 목소리로 "잘 있니? 엄마도 잘 있단다. 건강을 꼭 챙겨서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아라!"라는 말씀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은 어머니! 50년 전 모습으로 오늘 밤 제 꿈에 나타나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