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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 작가들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대한민국 여자로 살다보면 한번쯤 들을 법한 그녀들의 이야기인데, 소설 속에서 만난적은 드물다. 자극적인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소설이 아니다. 보통의 그녀들이 혹은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서 들었을 법한 에피소드인데, 뭔가 마음이 찐하고 뭉클해졌다.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가족과 손절하는 여자, 딸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 가족이라 믿었던 이복 남매 사이가 남처럼 씁쓸해지는 여자. 책을 읽는 내내 환한 미소보다 짠하고 먹먹한 감정이 컸다. 소설 속 인물들이 꼭 내 친구인 냥 마음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친구가 있고, 딸이 있고, 엄마가 있고, 오빠가 있고, 언니가 있고. 소설 속 그녀들은 약하지 않았다. 소설 속의 그녀들은 타인에게 의지하기 보다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었기에, 치열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었기에, 단순히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어딘가에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응원하고 싶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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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가 오목대를 내려와 한옥마을로 돌아갈 것인가, 치명자산으로 갈 것인가 물었을 때 할리는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라는 구호를 떠올렸고, 그 말은 낯익은 그곳에 가고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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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준으로 열심히 살고자 새벽에 나온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날 처음으로 할리는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할리가 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용실에 취업해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엄마와 아빠와 남동생을 이쪽에서 먼저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은 한지길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이 길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숭고한 새벽길이 그때의 할리에겐 세상 무엇보다 지긋지긋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고향은 할리의 첫 손절 대상이 되었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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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거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맛집을 찾아 예약 버튼을 눌렀다. 당분간은 가능한 한 낯선 방향으로 갈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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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는 거지? 흔히 하는 인사말이었지만 그 일 이후로 미연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짐작해보곤 했다. 정말 잘 지내기를 바라서 일까. 미연도 흔한 인사말을 받아들일 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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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버려진 바다 같아. 승재는 소설 끝에서 관람차 창문 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그날 이후로 미래를 미리 본 사람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 멀어졌다고도. 미연은 실제로 자신이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해변에 서 있던 오리배를 보았다. 끝이 정해진 바다와 진짜 바다는 건널 수 없는 오리배. 해맑은 표정과 녹이 슨 몸체가 기억났다. 지금의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느낄 뿐. 이제 진짜 다 사라졌네. 유나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려고 했으나 인파 틈에 섞여 잘 보이지 않았다. 미연은 가까이 다가갔다. 유나의 웃음이 낯설면서도 어딛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 유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핸드백 안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응원봉이 다시 발광하고 있었다. 미연은 자신과 같다고 여겼다. 응원하다 지쳐 버렸지만 여전히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혼재되어 패악을 부리듯 발광하는. 빛나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질척대는. 미연은 몸을 돌렸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혼자 대교를 건너 공연장에 앉아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푸른 바다 건너편에 딸을 놔두고. 꺼지지 않는 응원봉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여기에서 유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유나는 계속해서 결제 내역 문자로 동선을 알려주고 있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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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다. 시시하다고. 시시하지 않은 사랑이 있는 줄 아니. 지금 너를 온통 뒤흔들어도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라고 미연은 말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그 시시한 것은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 수도 없는데 이유 없이 돌연 끝나버리기도 하고 이유가 있어도 끝나지 않기도 한다고. 그 시시한 것들로부터 유나를 지키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조차 모르게 하고 싶었다.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