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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때 처음 ‘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남자 사람 친구가 되었다. 처음부터 커밍아웃을 한 건 아니었다. 국문과 동기로 3년을 함께 지내고 나서 친구는 고백했다. ‘나 사실 게이야.’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랬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어렴풋한 기억으로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냥 이 친구는 이런 성향을 가졌구나 그렇게 생각했고, 다음 날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께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성소수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멀리하거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다를 뿐. 게이 친구를 멀리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소설이나 영화 속에 ‘게이’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편견없이 보게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의 ‘나’란 남자 사람은 소설가이고, 엄마를 애정하는 인물.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건강하지? 조만간 얼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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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나는 엄마에게 그보다 더 어렸을 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느냐고 물었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기 전의 내 모습이,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우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궁금해졌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기억해내려는 듯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 시절의 내가 눈앞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말이야. 동네 아줌마들, 할머니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 어른들 옆에 얌전히 앉아서,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전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몇시간이고 울지도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오래 어른들 사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어.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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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서씨는 말했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오늘 장희 군한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삼촌은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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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희의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문득 P와 함께 살았던 집 주변을 하염없이 배회하던 밤들이 떠올랐다.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이대로 떠날 수도 없어서 누군가 내 목에 줄이라도 채워놓은 것처럼 숨막혔던 밤들. 눈물이 나는데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보겠다며 걷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물에 젖었다 그대로 얼어버린 신발이라도 신은 것처럼 비참했던 밤들. 그 밤들을 내가 오롯이 혼자서 감당했던 건 아니었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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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누가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알 테면 알라지 싶은 마음. 착각을 하든 억측을 하든 지들 좋을 대로 하라지 싶은 마음. 이제는 그런 마음을 먹는 것까지가 작업의 일부 같아서 이 정도의 해프닝은 그럭저럭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어도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는 ‘성소수자’라는 네 글자가 내 얼굴 옆에 달라붙어 있는 것에 기함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내 정체성을 세상에 떠벌린 것에 분개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그저 소설을 썼을 뿐이지 대사회적 커밍하웃을 한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그런 소설을 쓰고 하필 그 소설이 그런 제목으로 신문에 소개되면서, 엄마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위협을 느낀 듯했다.
엄마는 내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주장했다. 엄마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괘씸하다고 했고, 내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우리 얘기를 쓴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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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로 있는 시간을 만끽하는 엄마를 상상했다. 지금의 나처럼 해질녁의 창밖을 가만히 응시하는 엄마를, 거실 안으로 차오르는 아늑하고 고요한 황금빛을 마주하는 엄마를 떠올렸다. 보지 않아도 작게 틀어놓는 티브이 소리와 이따금 웅웅거리는 냉장고 소리를 흘려들으며 거실 소파 위 담요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 내킬 때까지 그 어떤 방해도 소란도 허락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 그러다가 문득 내가 떠오르면, 나는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지면 연락을 하거나,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엄마의 모습을 나는 또 속절없이, 손실없이, 남겨 보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전화기 너머에서 말을 이었다. 가까이 살면 좋겠어. 지금은 너무 멀어.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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