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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그 시절, 그리고 다시 마주한
나의 청춘

by 라니

요즘 시작한 드라마 태풍상사를 보며, 1997년 IMF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OO기업에 입사하기 전, 내가 다니던 회사도 IMF 여파로 무너졌다.
당시 나는 지금은 사라진 회사 OO그룹 계열사였던 OO기업 구매팀에서 자재관리를 맡고 있었다.

매일같이 거래처 전화 받고, 입고량 맞추느라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회사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회의실은 야간에도 자주 불이 켜졌고, 납품업체 전화는 ‘언제 돈 주냐’는 말뿐이었다. 공장에서는 자재가 떨어져 기계가 멈췄고, 사무실엔 답답한 침묵만 흘렀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자 동료들 얼굴에도 불안이 스쳤다. 그래도 그때는 모두가 ‘조금만 버티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서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회사는 모기업의 지원이 끊기자 회사는 부도처리 되었다.

회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나는 그 무너지는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공장 안에 멈춰 선 기계 소리, 팩스로 찍혀 들어오던 거래처 독촉장, 점점 줄어드는 직원들. 일이 없으니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미안했다. 결국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상사는 “곧 정상화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라며 붙잡았지만, 마음은 이미 그곳을 떠났다.


퇴사 마지막 날, 오랜만에 아끼던 정장과 구두를 꺼내 신었다. 늘 가던 길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회사 정문을 나설 때 내 손에 들려 있던 건 작은 쇼핑백 하나뿐이었다. 겨울바람이 차갑게 스쳤지만, 그보다 더 싸늘했던 건 마음이었다. 회사가 어려울때 떠나는게 왠지 배신 같아서 씁쓸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느꼈던 묘한 씁쓸함이 지금도 선명하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가 조용히 본인 차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시 생각해보라던 친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가 떠나주는게 회사에 도움이 될꺼라 생각했다.


차안에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익숙한 풍경들이 그날따라 낯설게만 보였다.


IMF 시절, 모두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에는 사람 냄새가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서로 깔깔대며 웃었고, 현장 아주머니들과 커피 한 잔 마시며 자재도 나르고 같이 일손을 보탰다. 다들 힘들었지만 ‘내일 남의 일이 없이 모두의 일이였다. 같은마음 하나로 버텼다. 그 시절엔 경쟁보다 서로의 배려가 더 익숙했다.


드라마속 주인공이 72년생이라는 설정을 보며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

뉴스에서 들리던 ‘오렌지족’ 이야기, ‘언젠가는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 머리에 브릿지를 넣고 통 넓은 바지를 질질 끌며 친구들과 어울리던 나.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해 옷을 싸 들고 다니던 그때. 어린 시절의 나를 드라마가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퇴사 후에는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3개월을 버텼다. 결혼하라는 잔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밖으로만 돌며 현실을 외면하던 그 시절, 가족과 함께한 추억은 많지 않다. 나도, 부모님도 먹고 살기 바빴다. 시골마을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추웠다. 난방도 부족했고, 저녁이면 어둑한 방 안에서 라디오 소리만 들리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나는 50대가 되었고, 또 한 번 긴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회상하는 장면에 주인공의 아버지가 말했다.


“떨어지는 꽃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이기는 중이다. 그래서 떨어지는 거다.”


봄날의 벚꽃처럼, 우리 부모님도 그 시절 그렇게 버티며 살아오신 것이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자식이 어떻게 자랐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그 삶의 무게를 다시 느꼈다. IMF라는 파도는 모두를 흔들었지만, 그 속에서 부모님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버텼다.

언젠가 내가 여든이 되었을 때도,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게 될까?


오늘도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스스로 다짐한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빚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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