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쓸데없는 고집을 지닌 사람인데, 그중 최고의 고집은 ‘블랙베리’를 쓰는 것이다. 아이폰도 갤럭시도, LG에서 나온 휴대전화도 아닌 블랙베리라니. 이미 한국에선 구할 수 없는 휴대전화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블랙베리를 쓴다고 말하면 ‘그게 뭔데요?’ 라거나 ‘블루베리?’라는 이야기만 듣는다.
블랙베리를 쓴 지는 5년? 6년인가. 이제 지나온 해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썼다. 은행 앱이 돌아가지 않아 오랜 기간 직접 전화를 걸어 송금했고, 카카오톡에서는 이모티콘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 ARS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금하면 안전해 보이기도 했고, 이모티콘들은 대부분 감초의 역할을 할 뿐 주인공까진 아니어서 불편함도 못 느꼈다. 그저 작고 예쁜, ‘토독토독’ 소리를 내며 글자를 써 내려가는 블랙베리가 내 손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또 하나 기뻤던 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모두 나의 블랙베리를 쳐다본다는 것? 관심종자인 나는 이러한 관심을 즐겼다. 꺼내놓고 일부러 메시지를 많이 보낸다거나, 카페에선 테이블 위에 꼭 블랙베리를 올려두곤 했다. ‘내 새끼 자랑’ 때문인지 여태까지 블랙베리와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만.
쓰던 블랙베리를 다른 블랙베리로 교체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었다. 블랙베리가 자살하면 교체한다. 첫 번째 블랙베리는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포맷을 하더니 벽돌이 됐다. 마치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잠수 이별을 한 것 마냥(그런 적은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연락은커녕 나의 자료들도 싹 날아갔다. 전화번호부까지도! 두 번째 블랙베리, 세 번째 블랙베리도 1년 즈음 지나면 손쓸 겨를이 없이 여러 방법으로 죽고 말았다.
지금 쓰는 다섯 번째 블랙베리는 그간 많이 발전해서, 안드로이드를 탑재하고 탄생했다. 덕분에 카카오톡도, 은행 앱도, 심지어는 지문인식까지 사용하게 됐다. 스페이스 바 위에 손가락을 올리면 지문 인식이 되는, 꽤 쿨하고, 꽤 멋있는 기능을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다. 예를 들면 사진이 지워지지 않는다거나.
사진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 뭐 큰 문제냐 싶겠지만. 지우기는커녕 사진을 보려 ‘포토’ 앱을 켜면 자꾸만 꺼지는 문제도 있다. 정말 꾸역꾸역 지우고 싶은 사진이 있는데, 블랙베리는 도와줄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오래 사랑했지만 이제는 보내주어야 하는 나와 그의 사진들, 눈에서 보이면 자꾸 잊히지 않아 없애려 하는데 블랙베리가 극구 말린다. 예전엔 자살하며 사진이고 번호고 다 날려버려 타의(?)에 의한 기억삭제를 하더니! 이제 너에게 주체성이라도 생긴 거니.
이별 후유증을 털어버리는 건 가끔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진행된다. 이렇게 블랙베리가 자살로 도와주거나, 친구가 함께 술을 마셔주거나, 결국엔 또 새로운 사랑이 찾아와 마음을 채우거나 하는 것들. 이번에 블랙베리는 내 조력자 역할을 할 생각이 없나 보다.
블랙베리 회사는 망한 지 오래다. 블랙베리가 회사를 중국에 팔아버리기도 하고, 중국 회사에서도 1~2년 좀 해보더니 안 되겠는지, 블랙베리를 버리기도 했다. 굉장히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의 블랙베리는 볼 수 없는 건가 싶었다. 지금 쓰는 이 친구가 마지막 모델일 것으로 생각하며 이 친구가 자살하게 되었을 땐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했다. 상심하고 있던 와중, 2021년에 새로운 블랙베리가 나온다는 뉴스를 접했다. 블랙베리 생활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늘 ‘이번 사랑은 마지막이겠지’ 하며 깊은 마음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이별마저도 열심히 한다. 애써서 아파하고, 오랜 기간 그리워한다. 열심히 한 이별들 덕에, 후회의 시간은 없었지만 이별한 후엔 다음 사랑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끝없이 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예쁘지도 않고, 기능마저 별로인 블랙베리도 새로운 모델과 함께 새 출발을 한다. 퍽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블랙베리보다 내가 조금 더 예쁘니 나 또한 새로운 사랑과 애쓸 수 있겠지.
2021년이 끝나기 전엔 새로운 블랙베리와 함께했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해외직구를 통해 어렵게 어렵게 블랙베리를 모셔와야겠지만, 모셔온 만큼 더 사랑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친구와 쌓아나갈 어여쁜 추억도 기대가 되는 것은 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