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완벽히 이사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다른 일을 하던 중, 휴대전화에 할아버지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할아버지가 허허 하고 웃으시며 “집에 꽃이 예쁘게 폈는데, 보여주고 싶어서~”라는 말을 하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몇십 년간 집에서 꽃과 작은 나무들을 키웠다. 덕분에 봄이 되면 그의 집에선 항상 꽃향기가 진동을 했고, 난 그 냄새가 늘 익숙했다. 이번에도 나에게 익숙한 냄새를 전해주고 싶은 그가 영상통화라는 버튼을 누르셨던 거다. 결론적으로 영상통화는 실패했지만, 영상통화를 시도하려고 6번이나 할아버지와 전화를 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오늘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저 따뜻한 문장도 얻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이태원 한복판’에 있는데, 같이 있으면 이질적인 두 단어가 함께 있을 때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이태원 한복판에 있는 할아버지 댁을 방문할 때는 특히. 그 덕분인가, 오늘도 이태원에 있는 할아버지의 집과 보지 못한 꽃들 덕에 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통화를 마친 후, 꽃이 예쁘게 폈다는 말을 되감다 한참을 울었다. 이별이 지나간지도 오래됐고, 회사도 이직을 잘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완벽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엉엉 울다가 괜한 비 탓을 해 봤다. 봄이 되었다고 말해놓고 비가 내린 날씨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울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덕분에 이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조차 없었고. 그렇지만 왜 울었냐고 따져 묻고 싶지도 않았다. 괜히 따져 물었다간 오늘 하루를 통으로 날릴게 뻔했다. 지난 연애의 흔적을 뒤척여 볼 수도 있을 테고, 또 회사를 버텨내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느라 자존감이 깎이고 또 깎였을 수도 있었다. 그냥, 마음 한편에 풀지 못한 짐들을 쌓아둬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도 오늘은 할아버지 덕에 마음에 쌓인 짐 중 하나를 풀어냈던 것 같다. 분명 울고 싶던 날들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순간에, 할아버지가 잠시 엑셀을 세게 밟아 주신 느낌. 어릴 적부터 나를 길러온 할아버지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내가 필요하다 외치지 않았는데 전화 한 통이 온 것을 보면, 내가 울어야 할 타이밍에 울 줄 아는 손녀이길 바라셨던 그의 바람이 통한 것이려니.
손녀가 잘 자라기만을 바란 그의 바람 덕에, 나는 오늘 많이 울었다. 그리고 마음 구석에 쌓아뒀던 수많은 짐들이 수없이 많은 말을 거는 걸 들었다. ‘나 아직 안 풀었는데?’하며. 오늘이 아닌 날에 마음 짐이 내게 말을 걸면, 나는 또 무너지고 말겠지만. 그래도 그런 무너짐의 순간에 할아버지의 문장을 기억하면 또 극복할 수 있다는 팁 하나를 얻었다. 꽃이 참 예쁘게 폈으니까.
요즘은 마음 이사를 하려 준비하는 중이다. 저렇게 풀지 못했던 짐들은 데려갈지 말지부터 정해야 하고, 새로 만난 짐들도 놓을 곳을 정해야 한다. 이삿짐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부터 문제가 되겠지만, 어쨌든 마음을 정리하고 이사할 용기를 만들었단 것만으로도 잘했다며 칭찬해주려 한다. 쓰던 마음을 싹 비우는 건 아직 어렵겠지만, 버리고 담을 것들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할 거라 믿는다.
바쁘다는 핑계는 그만 대고, 조만간 할아버지 집에 들러 예쁘게 핀 꽃을 구경해야겠다. 할아버지에게 영상통화하는 방법을 다시 알려드리고, 꽃 사진도 마구 찍어와야지.
이태원 한복판엔, 여전히 따뜻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