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비포 선라이즈보다 이터널 선샤인을 더 좋아하는데 말이죠.
10분이나 야근을 하고 퇴근한 수요일 저녁. 엄마가 지난밤 손수 만들어 놓은 육개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밥 먹는 행위를 위해 퇴근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집에 도착하자마자 육개장을 끓였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 흔치 않아서 그런가, 육개장이 끓을 동안 오늘 저녁 하고 싶은 것을 머릿속에 마구 그려 넣었다. 하고 싶은 일을 백 가지쯤 쌓았더니, 내일 지구가 종말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백 가지를 오늘 다 하지 않아도 내일 지구가 무사할 것 같기에 오늘 저녁은 백 가지 중 한 가지만 하겠다고 결정했다. 일단 영화를 보는 거다. 화이트 와인을 따르고 식탁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틀었다.
나는 영화 비포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 영화들을 몇 번이고 또 봤다. 하지만 오늘처럼 육개장을 앞에 두고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감성 충전용엔 화이트와인과 영화, 크 최고야!’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육개장을 끓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거다. ‘비포 선라이즈’는 대사가 많다. 또 그 대사들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라 꼭 집중해서 봐야 하는데, 하필 육개장이 내 앞에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배는 고팠고 육개장의 냄새는 끝내주었기에 ‘비포 선라이즈’와 ‘육개장’, 그 생경한 조합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한참을 제시(남자 주인공)와 셀린(여자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가다가 문득 아래를 보았는데, 아뿔싸. 내 바지에 빨간 국물이 꽤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밥을 먹는 것보다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중요했던 탓인 것 같다. 숟가락을 입으로 대충 욱여넣는 바람에 입 대신 바지가 육개장을 더 많이 먹었던 거다. 물티슈로 닦아내기엔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국물의 흔적이었다. 아, 내가 셀린도 아니고 뭐 이리 제시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겠다고 내 바지조차 챙기지 못했는가. 조금은 짜증 났지만 어차피 지금 닦아봐야 닦이지 않을 거, 육개장이 맛있어서 그냥 그대로 저녁 식사를 계속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참 많은 것들이 내게 자국을 남겼다. 게다가 지금처럼 그 자국을 모두 바로 발견하지 못한다는 게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예기치 못한 사람이 내 마음에 잠시 들렀지만 그 순간엔 그것이 큰 자국을 만들고 있다는 걸 몰랐다. 스스로를 돌볼 시간도 갖지 못해 남이 들어온 그 공간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던 거다. 분명 상대는 내게 지속적으로 예쁜 색들을 남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내 마음엔 얼룩만 남아있었다. 아무 색이나 칠하도록 마음은 멋대로 펼쳐놓고 나는 그 위에 물을 붓기도 하고 다른 색도 얹어가며 예쁜 색에 상처를 만들어 둔 거지 뭐. 그리고 그걸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그의 마음은 나 때문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
조금 여유가 생겼을 즈음, 내 마음 한구석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보았다.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는 단어들이 떠다녀, 지금의 육개장 자국처럼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뒤늦은 감사를 전하거나, 사과해 봐야 쌍방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 같아 그냥 현재의 삶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내가 육개장 자국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저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물론, 마음은 그렇다 쳐도 굳이 육개장까지 내게 자국을 남길 필요는 없었지만.
하지만 언젠가 그를 마주하게 된다면, 볼품없던 내 마음에 예쁜 색을 칠해준 것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아마 그 사람이 내게 칠한 색은 육개장 같은 빨간색이 아닐까. 그 시간엔 알아차리지 못한 빨간색을 이제야 알아차려 미안하단 말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야 나는 사실 빨간색보다 파란색을 더 좋아한다는 ‘투 머치 인포메이션’도 전할 거다.
이번에 또 만난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제시와 셀린이 시를 써 주는 비엔나 부랑자를 만난 장면이다. 그 시인(혹은 부랑자)은 제시와 셀린을 향해 ‘밀크 셰이크’로 시를 써 줬는데 어쩜 저리 낭만적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를 들은 제시와 셀린의 아주 상반된 반응도 유독 마음에 들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들을 쳐내기에 급급한 요즘이지만, 어쨌든 육개장은 맛있었고 ‘비포 선라이즈’는 여전히 좋았다. 그리고 오늘은, ‘난 시가 인생을 흥미롭게 한다는 말이 맘에 들더라'라는 셀린의 말이 흔적으로 남았다. 뭐라도 하나 남기게 된 밤, 마지막 남은 화이트 와인의 한 모금을 마저 마시면 더 완벽한 밤이 되겠지.
그나저나 조금 걱정되는 것도 덩달아 생겼다. 육개장의 빨간 국물은 뭐로 지우면 가장 잘 지워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