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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권투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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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 Jan 12. 2023

권투 2일차 | 우리 몸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1월 12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의 2일차. 식당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늘은 걸어서 복싱 짐까지. 기온이 꽤 많이 올라 걷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한 여름 땀 흘리며 걸었던 길을 패딩을 챙겨 입고 걷고 있다. 한 여름 폭우 속에도 걸어서 복싱 짐을 가고, 35도가 넘는 날씨에도 걸어서 갔던 길이다. 보광동 명성에 맞게 높은 언덕길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돌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있다.



1시부터 3시까지는 브레이크 타임이라 관장님이 대부분 안 계시는 시간인데, 오늘은 아이들과 같이 샌드백을 치고 계셨다. 꺄르르 꺄르르 하는 소리가 복싱 짐을 가득 채운다. 러닝머신을 타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좋아 나도 모르게 같이 웃고 있다. 뭐가 저렇게 즐겨울까. 친구들끼리 모여 샌드백만 쳐도 저렇게 좋을까. 관장님이 힘을 줘서 샌드백을 치면 세명이 다 나가떨어지는데 나뭇 바닥을 구르며 좋아죽겠다며 웃는다. 저들에게는 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할까. 지금은 모르겠지. 걱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는 완벽한 순간. 티 없이 해맑게 목구멍을 다 보이도록 마음껏 웃는 순간. 우린 언제 저렇게 웃어보았는가. 애들아, 마음껏 즐겨라. 너희의 어린 시절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들을.


워밍업 운동을 끝내고 줄넘기를 하는데, 오늘 유독 더 줄넘기가 안 넘어지고 줄넘기는 계속 꼬이고, 걸리고, 또 오른쪽 허벅지가 갑자기 아파지고 역시나 운동 이틀차의 어떤 조짐이 보이는구나. 몸에서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너 운동 계속 안 했는데 왜 갑자기 열심히 하는데, 힘들다고!! 소리치는 나의 허벅지들. 그래, 미안하다. 너무 쉬었지?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노래에 집중해 보기도 하고, 그러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꿔본다. 생각을 하지 말자. 내 몸의 움직임에만 집중해 보자.


지옥의 줄넘기 시간이 끝나고 물을 한잔 마시려고 마스크를 내렸는데 얼굴에 땀이 조금 흘렀다. 여름에는 이미 이때부터 땀이 주르륵인데 겨울이라 혹은 워밍업 때 달리기를 제대로 안 해서 아직 땀이 많이 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 얼굴의 땀만 흘러도 아, 개운하다는 느낌이 온몸에 흐른다. 기분 좋은 느낌.


오늘 걸어오면서 조군이 이야기해 준. 시작할 때 기분 좋은 것보다 끝났을 때 기분 좋은 행동을 해라. 술을 마실 때 처음에는 굉장히 기분이 좋은데, 많이 마셨을 때는 토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끝이 안 좋다. 패스트푸드를 먹을 때도 한입 먹었을 때는 기분이 좋은데 다 먹고 나면 속이 좀 불편하다. 그러나 운동은 시작하기 전에는 굉장히 하기 싫은데 하고 나면? 개운하고 굉장히 좋다. 오오오오, 그러네.



관장님과 미트 시간.


원, 투 오른쪽 이동할 때 오른쪽 발 보폭을 더 크게 해야 하는데 소심하게 움직여서 지적.

고개가 같이 가지 않아서 지적.

어퍼를 할 때 바로 하지 않고 뒤로 너무 뺀 다음에 해서 지적.


운동을 쉬었던 시간이 있어도 다행히 어느 정도 몸이 동작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지만 완벽하지 않다. 행동이 굼뜨고 자연스럽게 되던 동작에서 계속 버벅댄다. 직접 할 때도 느끼지만, 영상을 찍은 뒤보니 훨씬 더 자세히 보인다.



"투가 잘 나와야 왼쪽 어퍼도 편하게 잘 나와요."


원, 투가 들어갈 때 투가 쭉 잘나가야 그 반동으로 왼쪽 어퍼도 편하게 잘 나온다는 말씀. 말을 새겨듣고 다시 한번 확실히 자세가 달라져 있다.



오늘 원, 투 바디, 훅

즉 더블을 처음 배웠다. 바디와 훅은 원래 하던 동작이라 알고 있지만 두 동작을 이어서 하다 보니 바로 되지 않아 몇 번이나 다시 했다. 하나가 되면 하나 동작이 무너지고 한번 꼬이기 시작한 동작은 끝날 때까지 꼬여 나중에 샌드백을 치면서 연습하라고 하셔서 샌드백을 잡고 연습. 연습. 연습.


*더블은 3가지 동작이 합쳐진 거다.

1. 바디가 나갈 때 바로 나가야 되며 길게 쭉 뻗어줘야 된다. 이때 시선은 정면.

2. 바디 후 바로 가드를 잘 올리고, 이때 왼쪽 가드 팔이 벌어지지 않게 기억. (이게 너무 안돼서 돌아버려)

3. 왼쪽으로 몸을 회전하면서 그 반동으로 훅. 훅 할 때 왼쪽 팔 각도 떨어지지 게 않게 기억. (어깨 회전을 기억)


"선수들이 경기할 때 가볍게 두 번 툭툭 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스텝이 다 있어요. 수많은 연습으로 자연스럽고, 빠르게 더블을 할 수 있는 거예요.권투 잘하는 선수는 더블을 굉장히 잘합니다. 잘 하면 또 멋지고요. 왼쪽 더블은 어렵긴 해요. 그래도 연습하면 됩니다!"


아, 멋져지고 싶다. 그래, 연습만이 살길이지. 확실히 관장님이랑 할 때 계속 잘 안되던 게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샌드백을 보면서 하다 보니 조금씩 몸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뇌에서 받아들이고 몸이 기억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기한 일이다. 몸이 기억하는 건 잘 잊어버리지 않는 것 또한. 그래서 친구 중에 한 명은 올해 몸으로 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머리로 기억하는 건 나이가 들수록 한계가 있을 수 있는데, 수영 / 테니스 / 요리 등 몸이 기억하는 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 예로 유튜브에서 본 영상인데 예전에 유명한 발레리노였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린 한 노인에게 발레 영상을 보여줬더니 바로 그 동장을 따라 해서 모두가 놀라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우리 몸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지금이 39살이니깐. 50살이 되어도 이 동작들을 멋지게 해낸다면 꽤 멋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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