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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 Aug 24. 2015

백의 그림자, 황정은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그렇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시대이다. 끼니를 거를 만큼 가난했던 시대를 벗어났지만, 그때보다 왠지 더 치열하게 각자 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사회의 불편한 일들은 뉴스에 나오는 평범한 일들이 되어버렸다. 내 삶을 바로 세우기도 힘든데, 남의 불편은 우리에게 가까이 올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되어버렸다. 


이런 와중에 '백의 그림자'라는 소설이 나와주어 고맙다. 

'은교'와 '부재'는 굉장히 부드럽지만 강한 목소리로 이 사회의 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사십 년 된 전자상가가 있다. 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를 묻는다. _ 문학평론가 신형철_] 


철거를 앞둔 전자상가의 각 동에는 빽빽하게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들어가 있었다. 전자상가 나동에서 일하는 은교와 무재는 그 안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은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지만, 타인의 의해 그 삶이 무너지게 생겼다. 얼마나 심플한지 '철거'라는 말 한마디에 그들이 이제껏 쌓아왔던 세월은 그냥 그 곳의 먼지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 걸리적거리니, 쓱 닦으면 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들의 삶에 대한 '예의'라고는 정말 먼지만큼도 없는 빠른 철거의 장면을 보며 곳곳에 그렇게 일어났던 현 사회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냥 잘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남의 일'이거니와 '좀 딱한  일'일뿐이니깐. 


은교와 무재. 이렇게 순수한 이들이 현 주소에 살아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대화는 악의가 없다. 느리지만, 가끔 무섭도록 옳은 것을 말한다. 온갖 머리를 굴려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 말하는 것을 배운 것마냥 살아온 우리들로서는 조금은 답답하게 보일지 모르는 그들의 대화가 난 좋았다. 은교는 무재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견뎌냈을까. 사랑은 그런 걸까. 서로 '나를 사랑하니'라는 물음을 계속 던지는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녀가 정전으로 어둠을 느끼고 있을 때, 어둠을 그냥 같이 나누고, 잠이 오지 않다고 하자 저녁 아홉 시에 운동을 하면 잠이 올 테니, 배드민턴을 치자고 달려오는 그런 모습들이 그냥 사. 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교와 무재의 이야기 말고, 특히 오무사 이야기가 슬프면서도 현실에 있다면 찾아가 그 곳에 가만히 앉아있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무사는 작은 전구를 파는 곳으로 꼭 전구를 살 때마다 한 개씩이 더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주는 것이었다. 

은교는 "나는 그것을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 선지 들지 않고요."라고 말한다. 오무사에 들어가면 사회의 시간이 아니라 오무사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구절을 읽으며, 그렇게도 살 수 있는 삶인데 우리는 위쪽만 바라보느라 그 세상의 속도만 맞추느라 우리들만의 속도를 잃어버린 것 같다. 오무사의 할아버지는 철거 이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현실의 오무사들도 그렇게 사라졌겠지. "오래되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으니, 우린 철거하고 부수고 새로 짓고 그렇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것들을 바쁘게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소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무언가에 가로막혀 내가 보지 못하는 시선을 가진 작가,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글, 마지막으론 소설책을 덮고도 내 뒤를 따라다니는 주인공들을 만들어낸 재주. 황정은 작가, 그녀의 소설을 모조리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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