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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창완 Feb 27. 2020

내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

내 첫 글쓰기

시골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내 첫 기억은 한살 때쯤이다.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한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근거가 있다. 난 작은 아버지가 결혼을 한다고 작은 어머니를 모시고 올 때 기억이 있다. 두분은 결혼을 하고, 사촌 여동생을 낳았는데, 내 여동생과 같은 세살 터울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내 옛집(지금 우리 시골 집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의 기억들이 몇가지 있다. 멀리 보이는 화장실 옆에서 마을 보는 기억도 있다. 


그 윗집에서 얼마전까지 살던 고향집으로 이사 내려올 때도 기억이 선명하다. 마당에서 이숙이 경운기를 이용해 도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쌀이 나오면 신기하기 그 아래서 받아 먹기도 했다. 


이사한 날 뜨듯했던 아랫목도 기억이 난다. 


여섯살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난 날은 더 기억이 선명하다. 어머니는 산통을 하고, 아버지는 집 입구에서 돼지 두엄을 치고 있다가 금줄을 걸었다. 남동생이 낳으니 금줄에는 빨간 고추가 달렸을 것이다. 


나는 세살 터울의 여동생과 마루에서 초조하게 놀았다. 그때가 1975년 겨울이 올 무렵이다. 


우리 부모님은 원래 다섯째인 나까지만 낳으려 했다. 그런데 내 아래 여동생이 생기고, 그 아래 남동생이 3살 터울로 생겼다. 지금 우리 7남매 가운데 어머니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자식은 내 동생 둘이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시골 마을에서는 학교 가기 전에 한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뭐 영특한 애들 가운데는 먼저 공부해서 아는 이들이 있을텐데, 나도 배우지 않았다. 


그런데 한자는 먼저 배웠다. 초등학교 가기 전에 우리 동네에 영재 아버지가 서당을 열였다. 겨울이 올 무렵 영재네 집에 가서 천자문 등을 배웠다. 그런데 그리 오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대강 천자문의 초반만 배우다 흐지부지 됐다. 


그리 머리가 나쁘지 않아서 가르쳐주시는 한자는 남들보다 떨어지지 않게 배웠던 것 같다.  


나중에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한자를 본격적으로 배워야 했다. 하지만 한자는 녹녹치 않았다. 해석은 물론이고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같은 이들이 그렇게 한자로 명문장을 써내려간 것을 보면 글의 천재는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언감 생신이다. 


그렇다고 한자에 약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자는 5~8천여자는 넘을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쯤에는 어림잡아 신문에 혼용된 한자를 이해했다. 서울신문이었는데, 그 정도면 제법인 셈이다. 


그런데도 중국어 시험을 볼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게 한자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게을러서 더 꼼꼼하게 암기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간 사십수년을 봤으니, 쓰고 싶을 때면 튀어나오기도 하련만 그러지 않는 얄미운 게 한자다. 


뭐 이제는 내 머리를 탓할 나이도 넘어서 괴념치 않는다. 


그러다가 나도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드디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가나다라를 외우기 시작했다. 공부가 특히 흥미있는 것도 글을 배우는 것도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중국 운남성 리장에는 현존하는 상형문자가 있다. 동파문자가 그것이다. 벽에 있는 글씨를 보면 동파 문자와 아래 한자로 되어 있다. 윗쪽 왼쪽부터 부강, 민주, 문명, 자유, 평등, 공정, 애국, 경업, 성신이 동파문자로 병기되어 있다. 이 동파문자 전집은 100여권으로 되어 있었다. 정말 사람이 그 문자를 다 알 수 있다면 기억력이란 것도 대단한 것이다. 물론 지금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10만여개에 달하는 한자를 모두 아는 사람이 있을까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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