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5> 어디서 책을 고를 것인가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장 행복한 공간은 서점과 도서관이다. 서점에서 무엇을 읽을까를 고르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내부 구조가 바뀌기 전에 교보문고나 종로서적은 내 기억 속에 책을 찾아 헤매던 공간이다. 주로 신간 코너의 책들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사야할 책을 골랐다. 대부분의 서점은 신간서적을 모아놓은 공간과 인기가 있는 베스트셀러를 모아놓은 좌대 공간이 있다. 이십대때는 살만한 책을 고를 공간이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정도가 그나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대형 서점의 체인들도 적지 않아서 편히 책을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책 고르기가 더 애탔던 것은 대학시절이다. 고향 집에서 보내온 용돈이 아주 궁하지는 않았지만 책 사기에 풍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내가 책을 살 돈은 한정적이었다. 결국 학교 서점에서 한참을 돌아본 후에 아깝게 한권을 골라서 사왔다. 그런 궁핍이 때로는 작지만 좋은 책으로도 나를 이끈 적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학교 서점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어떻게 쓸 것인가>를 만났다. 보통 판형보다 작고, 아담해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대학 생활은 한 편의 논문을 통해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공감했다. 다른 동기들이 <김유정론>, <채만식론> 등 작가론으로 학부논문을 쓸 때, 나는 <한국 페미니즘 작품 연구>라는 거창한 논문을 구상했다. 사실상 워낙 범위가 넓고 생소해 학부생의 논문이 될 수 없지만 나는 이걸로 논문을 썼고, 논란 끝에 통과했다. 학부 논문이니, 통과됐지, 대학원만 됐어도 통과가 불가능한 논문이었다. 당대 여성작가 22명의 작품 세계를 분석해, 그 작품과 사회 흐름과의 근접성과 그 작품과 작가 개인의 삶의 거리를 분석해서 분석하는 방식이었다. 작가에는 시인, 소설가를 망라한 만큼 만만치 않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에코의 책을 바탕으로 그 작업에 가치를 부여하고, 맹렬하게 매진했다. 관련해 읽은 문학작품만 해도 족히 100권은 됐다. 이후 내가 피시통신 하이텔에 서평을 쓰고, 기자로서 글을 쓸 수 있게 한 힘도 당시 논문을 썼던 과정에서 길러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만약 서점에서 내가 그 책을 들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결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다.
이제는 정기적으로 서점을 들르기는 쉽지 않으면 짬 나는 시간을 이용해 잠시 서점에 들른다. 우선 시사잡지에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책을 고르는 게 가장 기초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신간이 출간됐을 때, 어떤 책을 다룰 것인가는 서평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매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방문해 책의 출간 방향을 읽어야 한다.
아쉬운 건 아이랑 대형서점을 잘 방문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랑 서점을 찾고, 아이가 책을 빠져들게 하고 싶었지만, 우리집 주변에는 그럴 만한 서점이 없었다. 또 아이의 독서는 윔피키드나 역사 등에 집중되어 있어서 서점을 찾을 필요가 많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또 우리나라는 아이가 교과 이외의 책을 보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원하는 책은 가능하면 구해서 사줬다. 수학능력시험을 본 후에는 에른스트 H.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보고 싶어해 구입해줬다. 아직도 수험생의 처지라 읽기는 힘들지만 아이는 메인 책장에 꽂아두고, 하루 빨리 읽을 날을 기다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편으로 짠하면서도 기꺼운 부분이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서점은 10% 할인받을 수 있었지만, 오프라인 서점은 정가로 사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교보문고 ‘바로드림’이나 영풍문고 ‘나우드림’은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할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억울함은 없다.
오프라인 서점도 있지만 이제는 온라인 서점도 상당히 중요한 책의 구매처다. 요즘은 어느 책이라도 10% 할인된 가격에 무료배송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면 된다. 오랜 서평가로 활동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때, 온라인 서점에서 구성하는 신간 소개에는 큰 불만은 없다. 물론 북마스터나 MD들이 추천하는 책들에 대한 믿음은 있다.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에 놓이는 책을 만들기 위해 비용이 들 듯, 온라인 서점의 좋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북마스터들은 책을 선정할 때 자연스럽게 출판사를 볼 수 밖에 없다. 오랜 이름을 가진 출판사들은 최고의 전문가가 책을 고르고, 그 책을 정성스럽게 편집해, 자기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평을 쓸 책을 고를 때도 그런 판단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작은 출판사들에서 나온 책들이 그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통영에 있는 ‘남해의봄날’ 같은 출판사는 지역적 어려움에도 든든한 중견 출판사로 성장했다. 필자가 이번에 헤세 책을 낸 ‘달아실’도 춘천에 위치했지만, 서울 출판사들도 하기 어려운 시선집을 내고, 중국 소설책을 내는 등 독특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에서도 실수하지 않고 책을 고를 수 방법은 많다. 온라인 서점에는 보통 책소개, 작가소개, 목차, 상세 이미지, 카드뉴스, 일부 책 내용 인용, 출판사 리뷰, 회원 리뷰 등을 소개한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미리보기’이다. 미리보기는 보통 책 표지부터 앞 부분 10여장 내외를 다 볼 수 있고, 뒷표지 등도 볼 수 있다. 책을 읽을 수 없을 지는 앞에 프폴로그와 목차를 보면 대부분 결정할 수 있다. 프롤로그를 읽으면 책을 쓴 이와 읽는 내가 어디까지 코드가 맞을 지를 느낄 수 있다. 그때 술술 읽히고, 머리에 들어온다면 마음을 열고 책을 사도 무리없이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하는 말이 명확하지 않고, 머리에서 맴돈다면 그 책은 사도 다 읽을 가능성이 많지 않다. 온라인 서점도 그 궁합을 볼 수 있다.
-영혼의 휴식처 도서관
내가 책을 만나기 더 좋아했던 공간은 도서관이었다.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도서관들도 있다. 가장 오랜 기억은 과천도서관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주말이면 나는 과천도서관을 찾았다. 당시 나는 안양유원지 근처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는 인덕원에 있었다. 그런데 안양도서관은 가기가 싫었다. 열람실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천도서관은 집에서 한시간여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했지만, 도서 열람실이 너무 좋았다. 신도시 답게 새로운 책도 많았고, 잡지 등도 풍성했다. 고등학생이니 수험 공부를 하는 게 맞았지만, 나는 책들에만 눈이 갔다.
가장 오래 기억이 남는 것은 정독도서관이다. 안국역에서 10분쯤 걸어가면 있는 정독도서관은 차분한 분위기와 가락우동으로 요기를 하면서 책을 읽기 좋았다. 다만 정독도서관은 열람실에 자리가 많지 않아, 항상 입구에서 내 운을 시험하곤 했다. 한 사람이 나오면서 자리표를 놓고가면 기다리는 대기자가 그 자리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상황을 봐서, 열람실 대신에 책을 빌리는 방식으로 도서관을 이용했다.
하지만 가장 오랜 기억의 공간은 대학교 도서관이었다. 그 많은 책 사이를 헤매다가 창가에 찾아든 고요를 만나는 기분은 특히 상쾌했다. 내가 도서관과 친숙해진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다. 학교 도서관에는 어마어마한 책이 있다. 앞서 말한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도 도서관을 방황하다가 만났다. 당시에는 책의 뒤편에 사용자 카드가 있었다. 나는 새로 온 책에 내 이름을 넣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전집이 나왔을 때는 모든 책의 첫 이용자에 내 이름을 넣으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시를 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당대 시인을 분류해 그들의 시집을 최대한 읽고, 좋은 시는 내 노트에 필사하긷 했다. 지금도 그 노트는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뒤에도 내가 시를 판단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물론 시에 대한 내 이해는 여전히 미천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수고롭게 100여권의 시집을 읽고, 느낌이 있는 시를 필사하다보니, 나름대로 시가 친근해졌다. 나는 대학시절에 시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시험철이 되면 평소에 부족했던 독서량을 크게 늘렸다. 하루에 대여섯권을 보는 날이 많았다. 덕분에 ‘대학에 있을 때, 하루에 한권 이상의 책을 읽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 도서관의 개념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인터페이스 문제가 있지만 전자도서관도 충분히 훌륭하다. 다만 전자도서관도 주민등록 주소지에 따라 등록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각 춘천에 살지 않는다면 춘천 전자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전자도서관의 장서 규모도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인기있는 베스트셀러 들은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전자도서관은 무료고, 마음 먹기에 따라서 좋은 책들을 고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서점이나 도서관과 친숙해지게 하는 것은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살면서 현명하고, 존경하다고 생각한 이들 가운데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치인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물론이고 세계적인 투자 그루 워런 버핏이나 짐 로저스도 평생 책을 놓지 않는 독서 매니아들이다. 버핏은 “당신은 결코 독서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서점은 내게 친구였고, 도서관은 아내 만큼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내게 꿈이 있다면 내 고향 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다. 북카페일 수도 있고, 나만의 서재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 책을 사랑하는 여행자가 찾아오면 밤새 책을 이야기하고, 한적한 시간에는 글을 쓰고, 비가 오면 파전을 붙이고, 눈이 오면 산을 오르고 싶다. 내가 알기로 고향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책마을 해리’가 꼭 적합한 곳인데, 안타깝게 그곳은 너무 커서 게으른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