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을 아이들의 사계절 나기
드디어 나도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한글을 배웠다. 내 위로 누나 셋, 형 하나가 있어서 학교를 가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내 기억에 있을 만무하다. 그런데 나를 학교에 데려갔을 때, 주변의 반응은 이랬다고 아직도 어머니는 말한다.
“아이고, 무슨 애가 쌀밥만 먹었는지 얼굴이 뽀얗네”
아무것도 없는 집이지만 어머니는 시집와서 하나하나씩 쌓아가던 탓에 우리 집은 차츰 괜찮아졌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고무신을 신었지만 3학년 때쯤부터는 검정 운동화를 신었다. 가끔은 하얀 운동화를 샀다. 내가 뽀얗다는 말을 들은 것은 어떻든 어머니가 잘 먹여주신 덕으로 보인다.
나도 일반 학생이 그렇듯 별 탈 없이 한글을 배웠다. 1학년 때 공부는 그다지 잘했던 기억이 없다. 대충 했다. 형 따라서 집에서 학교까지 1.2킬로미터 정도의 길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계절마다 그 길에는 다양한 꽃이 피고, 나무들이 제 각기 모습을 드러내고 살아가고 있었다. 윗동네 어느 분이 밭에다 해마다 다른 특용 작물을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3년 정도의 간격으로 그 비싼 작물들이 바뀌는 것을 보면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나무 밭은 성공적으로 안착했지만 다른 과수는 별 볼일이 없었다. 내가 어릴 적 심었던 배나무는 제대로 접을 붙이지 못했는지 열린 배들이 나주배들처럼 깔끔하지 않았다. 돌배와 나주배의 중간 정도였는데, 맛이 덜했다. 더욱이 내 초등학교에 있는 향나무는 배나무에게 치명적인 병을 주었는지, 유독 병치레가 많은 과수원이었다.
그래도 봄이 되어 배꽃이 피면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우리 집 바로 위에 과수원이 있어서 유독 집을 밝게 했다. 배나무 이외에도 매실, 단감 등 아버지는 다양한 과수작업을 했지만 번번이 재미는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장이나 영농회장을 하던 아버지는 이 과정 자체도 자신의 자산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동네 들판을 뛰면서 살았다. 유독 뱀은 무서워했지만 산 아래 파놓은 작은 둠벙(웅덩이)에서 수영할 때나 마을 개울에서 천렵을 할 때는 그다지 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즘은 뱀이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한다.
봄이 되면, 선산에 솟아나는 삐비(띠풀)의 어린 순이나 찔레꽃의 어른 순인 찔룩을 꺾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달래랑 비슷한 달콤한 알뿌리도 좋았다.
여름이면 싱금이나 머루 같은 다양한 산 열매들이 우리를 자극했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적당히 따먹고 다녔다. 어린애들이 철없이 다니는 것은 산속 매서운 독사들도 실소하면서 봤겠지만 별 탈 없었다. 우리 집 밤은 인근에서 유명하다 할 만 실한 밤이 열렸다. 큰 것은 어른 주먹 반만큼 컸다. 맛도 나쁘지 않았다. 동네 어른들은 우리 밤 밭을 지나다가 혹시 해서 고개를 돌리면 독사를 봤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학교 가기 전부터 그곳을 안방처럼 나니며, 밤을 주워 날랐는데, 뱀을 본 적이 없다. 역시 뱀은 사람을 알아보는 사이코 애니멀(파충류?)이 틀림없다.
가을이면 산 열매들도 더 맛이 깊어졌다. 겨울을 준비하는 뱀들도 독이 강해진다는 것을 풍문으로 알아서 서로 조심했다. 또 가을에는 형형색색으로 열리는 열매는 먹을 게 별로 없었다. 말오줌때, 까마귀밥, 생강, 좀작살 나무 열매는 먹을 수 없었고, 그나마 입맛을 다실 수 있는 게 아그배나무나 산수유나무인데, 우리 동네 아그배나무는 벌레들이 먹어서 우리 몫을 거의 없었다.
겨울이면 산은 색을 잃는다. 눈이 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이다. 큰 매형은 눈 덮인 우리 동네를 보고, 알프스 산맥 같다고 했다. 물론 매형은 알프스를 다녀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 겨울이 오면 꿩이나 노루 같은 산짐승이 타깃이 된다. 노루에게 우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 동네에서 노루를 잡을 수 있는 분은 목굴 할아씨 밖에 없다. 아마 처갓집이 목골이나 못골이어서 당호가 그렇게 정해졌을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철사보다 단단한 들짐승용 덫을 만들어 노루가 다니는 길목에 놓았다. 그러면 한해에 두세 마리는 그 덫에 걸렸다.
불쌍한 짐승은 한참을 울다가, 할아버지에게 걸려 운명을 달리했다. 더러는 발견되지 않아 다 부패한 후에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겨울 산을 다닐 때면 이런 덫을 조심해야 했다. 줄로 된 덫도 있지만 톱니바퀴로 된 덫도 있어 사람도 걸리면 다리가 부러질 만큼 위태로운 모양이었다.
꿩도 실제로 우리 타깃은 아니었다. 꿩은 ‘사이나’라는 독극물질을 미끼 중에 섞어서 잡았다. 후각이 약한지 그걸 먹은 놈은 바로 독사했다. 언제 어느 시각에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운 좋은 사람이 꿩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 꿩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날은 눈 오는 날이다. 눈이 오면 먹이가 떨어진 꿩이 마을 근처 밭을 찾고, 독이 든 먹이를 먹는 놈이 많았다. 결국 운 나쁜 놈은 날지도 못하고, 그냥 푸석 눈 위에서 죽고 만다. 그걸 발견한 사람은 가져다가 내장을 모조리 긁어내고, 요리해 먹는다. 우리 집에서는 꿩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 우리 식구들이 눈대중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야생의 짐승을 잡아먹는 데 관심이 없었다.
어릴 적 천렵의 꿈 중에 하나는 산토끼를 잡는 것이었다. 동네 형은 우리 들 앞에서 아는 척 말을 시작한다.
“산토끼는 말이야.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 그럼 어떻게 쫓아야겠냐. 산 위에서 밑으로 쫓으면 돼. 지그재그로 뛰다가 우리한테 따라 잡히지. 그렇게 잡으면 돼”
그렇지만 내가 진짜 산토끼를 대면한 것은 시골에서 방위 받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 본 산토끼는 가공할 만한 동물이었다. 거의 귀신처럼 산길을 다니는 짐승이었지, 어린아이들에게 잡힐 나약한 짐승은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오히려 더 심한 허풍도 치셨다.
“곰은 어떻게 잡는지 아냐. 일단 곰은 사람들을 따라 하는 습성이 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거야 사람들이 놀고 있으면 멀리서 곰들이 사람들을 노는 걸 봐. 그때 우리가 한 사람을 꽁꽁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가는 거야. 그럼 있다가 곰들이 와서 똑 같이 해. 무리 중에 한 마리를 묶어서 매달아 놓고 가지. 그럼 그 곰을 잡으면 돼”
그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곰 굴에서 곰을 골탕 먹여 내 다리부터 먼저 잘라내는 방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곰 사냥을 하고 싶어도 우리 마을에는 곰이 없었다.
곰 대신에 우리는 방 한편에 움을 만들고 쌓아놓은 고구마를 가져다가 찌거나 구워 먹었다. 부지런한 사람이 있으면 뒤켠에 있는 동치미까지 가져다가 시원하게 같이 먹었다. 고구마 먹고, 동치미 먹고 우리는 이불을 가운데 두고, 말도 안 되는 허풍들을 쳤다. 나중에 파할 때가 되어 이불을 들치면 형언할 수 없는 다양한 방귀 냄새들이 섞여서 흘러나왔다.
방귀 냄새는 먹는 것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종류가 다양했다. 쌀밥에 고구마나 무를 넣어서 밥을 짓는 집도 있고, 보리밥만 먹는 집도 있고, 수수도 섞어 짓는 집도 있고 다양했다. 그렇게 입으로 들어가 작은 속이든, 큰 속이든 잘 삭히고 나온 방귀 냄새는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향긋한 삶의 냄새 기도 했다.
내 고향 마을의 앞면. 앞에 있는 산이 죽사산이다. 백수읍에서는 제법 큰 산으로 꼽히는데, 저렇게 아늑하다. 뒷면도 모두 산이라, 눈이 내리면 동네는 하얗게 바뀐다. 지금은 여동생이 고추농사를 저는 저곳에 배나무 과수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