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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창완 Feb 28. 2020

읽기에 빠지다, 첫사랑에 빠지다

읽을 것을 찾아서 다락방을 전전하던 소년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나는 읽는 즐거움에 빠져 들었다. 우선 우리 집에는 지극히 시골 집에 있을 정도의 책에서 조금 더 많은 책이 있었다. 아버지도 간간히 수필 책 같은 것을 읽었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에 누나 셋이나 형이 있는 만큼 이런저런 곳에서 정처 없는 책들도 있었다. 물론 그다지 읽을 만한 책은 많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 집으로 배달되는 잡지 ‘새농민’이었다. 월간지 였는데, 아이들이 읽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아이들 취향에 맞는 내용이 좀 있었다. 계속 구독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 새농민’은 정말 즐거운 잡지였다. 새농민은 농민신문이 발행하는 잡지였다. 어떻든 타깃이 우리 였으니 볼거리가 많았다. 하지만 한달에 한번 정도여서 아쉬웠다. 이밖에도 간간히 TV가이드 같은 잡지를 아버지가 사오셨다. 연예 기사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 안에 가십기사들을 챙겨서 봤다.     


 초등학교 후반으로 가면서 본 것은 집으로 배달되는 서울신문이었다. 아버지가 마을 일을 보셔서 배달되는 신문이었다. 당연히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내용의 1/3 가량이 한자로 되어 있었지만,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한자도 읽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새로운 읽을 거리가 더 필요했다. 우리 집에 가장 많은 읽을 거리가 있는 것은 마루에서 부엌 위쪽으로 난 다락방이었다. 허드렛 물건을 넣어두는 제법 큰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고등학교를 간 누나들의 책이나 형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심지어는 둘째누나의 일기장도 그곳에 차곡착고 쌓여있었다. 물론 이런저런 잡동사니도 흥미를 끌었다. 나는 그곳에 가면 누나의 국어책이나 도덕 책이 있고, 그곳에 가면 이야기가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난 어떻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찾아 다녔다. 상급학교의 책이라도 이야기가 있는 책은 구분하지 않고 보면 즐거웠다. 문제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여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락은 내 키보다 휠씬 높은 곳에 있었다. 결국 나는 부엌에서 마루로 난 문을 열었다. 그 문을 타고 위로 하나하나 올라가면 다락방에 접근할 수 있었다. 물론 위험천만했지만, 난 감행했다. 가끔 여동생에게 문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게 시키기도 했다.  


초등학교 3~4학년 경, 어느 생일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둘째 누나가 나에게 어린이용 소설 두권을 선물했다. 한 권은 <삼총사>였고, 한 권은 <주홍글씨>였다. 삼총사는 들자마자 빠져서 두 번 정도를 읽었다. 반면에 <주홍글씨>는 이야기의 핵심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앞 부분을 도전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곤 했다. 기억에는 동네 형이 그 책을 팔거냐고 물어와 팔아버린 기억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이 프라이드가 된 적도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과외활동이 있었는데, 나는 독서반을 들었다. 첫 모임에선가 선생님이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삼총사>를 읽은 학생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다. 몇사람이 더 들었는데, 어떤 질문에서 내가 대답하고 나서 우쭐해진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학교에서 시행하는 글짓기대회 같은 행사에 나가본 기억도 없다. 글을 쓰는 것 자체를 특별히 하지 않았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방학이 끝날 때 하는 일기 쓰기 이벤트다. 평소에 일기를 쓰지 않았는데, 개학 직전에 그 일기장을 모두 채워야 했다. 시골 아이들은 일상이 뻔하니 쓸 것이 많지 않다. 방학의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여름이면 헤엄을 치러가거나 일을 했고, 겨울에는 한없이 산들을 헤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쓸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혼자 광주에 있는 누나 자취방이나 잡은 집에 들러서 시간을 보냈다. 광주 불로동에 있는 누나의 자취방은 누나가 가면 심심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래도 고향 마을에 있는 것 보다는 나았다. 어린 아이가 광주에 갔다오는 것은 흔한 이야기가 아니므로 편하게 일기에 쓸 수 있었다.     

일기를 쓰면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날씨였다. 방학 내내의 날씨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 도착해 꼬박꼬박 쓴 친구의 날씨를 베껴 쓴 적도 적지 않았다.     


이야기를 탐익해가는 사이에 내 첫 이야기도 찾아왔다. 첫사랑이었다. 천둥벌거숭이로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갔다. 그런데 1학기 후반엔가 한 여학생을 담임이셨던 이광석 선생님이 소개했다.     

“오늘부터 우리 반이 된 박미라고 한다. 서울에서 전학왔으니, 잘 도와주도록”    

그런데 서울에서 온 것도 멋졌는데, 이뻤다. 수업이 시작된 후에 보니 공부도 잘하는 것 같았다. 그림 시간에 보니, 그림도 잘 그렸다. 난 금방 그 여학생에 빠졌다. 하지만 그 여학생에 내 존재를 드러낼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공부를 잘하는 것 밖에 없었다. 어느날부터 나는 아침 일찍 아버지와 일어나 국어책을 읽었다.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수업도 열심히 했나보다. 그렇게 2학년 기말고사까지 마쳤다.     

어느날 학교 후문으로 들어가는데 친구 영일이가 나를 붙잡고, 뭐를 보자고 했다. 창밖에서 우리 교실 칠판에 써 있는 글자를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오른쪽에 써 있는 글자를 봤다. 선생님이 쓰신 글이었다. ‘축 조창완 일등’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슴이 아팠다. 기말고사 후 어느날 내 목표였던 박미가 조용히 전학을 간 것이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시장 상인들과 쪼이(시골서는 도박성 화투를 그렇게 말했다)를 하다가, 파면되어 조용히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정작 내 목표를 이뤘으나 그 동기를 만들어줬던 여자 아이가 떠난 것이다. 3학년부터는 다시 공부할 낙을 잃고, 평소대로 살았다. 물론 한번 오른 성적도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시골 학교의 성적이란 게 그랬다.     

지금도 그때의 친구 ‘박미’를 두고는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교차한다. 누가 그녀라는 둥, 그런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에 있어서 그런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때의 박미는 나에게 베아뜨리체며, 엠마였고, 아사코였고, 윤초시네 증손녀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십대 초반의 그녀는 그때의 그녀가 아니다. 나도 내가 아니듯이


여의도 잡지박물관에 있는 잡지 전시대. TV가이드는 내 생일과 같은 날에 창간된 매체라는 게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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