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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창완 Mar 03. 2020

요즘 소설을 읽으면 지금 중국이 보인다

[연재 -요즘 소설로 읽는 중국(프롤로그)- 사람, 지역을 읽는 거울]

1998년 처음 중국을 방문했다. 하필이면 중국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궈칭지에(國慶節)에 톈안먼 광장을 들렀다. 머릿속에 그리던 모습보다 왜소한 톈안먼에 놀랐다. 그날밤 베이징 서역으로 가서 우한(武漢)행 기차를 탔다. 100년만에 대홍수를 겪은 도시는 의외로 차분했다. 주변을 취재하고, 난징행 배를 탔다. 유람선이 아닌 일반 중국인들이 타는 여객선이다. 우한에서 난징까지는 물길로 600킬로미터. 1박2일이 걸렸다. 지우지앙(九江), 안칭(安慶), 우후(芜湖) 같은 큰 도시에 서면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배와 부두 사이에 배와 요깃거리가 오가는 재미있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 배 안에서 나는 중국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우한에서 선박회사에 다니는 범여유 아저씨, 소림사에서 선생님을 한다는 총각, 수줍은 듯 있다가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다 우후에서 내린 아리따운 아가씨 등.



지금은 아내가 된 동반자의 통역을 통해서지만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다음해에 결혼을 하고 중국에 정착하면서부터는 중국 사람들이 더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글을 쓰니, 중국을 풀어써야 하는데, 도대체 중국 사람들을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물론 내가 살았던 톈진 사람들의 특성 조차도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중국어로 소통이 가능해지고,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같은 나라지만 1월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영상 30도가 같이 공존하는 나라니, 이들은 규정할 수 있는 특징은 없다. 수도인 베이징 사람, 경제의 도시 상하이 사람, 민족과 종교로 확연히 구분하는 신장 웨이얼족 사람, 시장 사람 등등. 물론 수없이 만나는 중국 동포들의 속조차 안다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들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이들을 좀더 알지 못하면 더 나갈 수 없고,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오마이뉴스는 물론이고 방송을 통해 중국을 소개하는 입장에서 내가 잘못된 시각으로 읽어내면 안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그로부터 스무해가 더 넘게 흐른 지금은 어떨까. 난 중국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를 지금도 고민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질 때 우리 나라에 번지는 '차이나 포비아'라 할 수 있는 사건을 나는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 가를 항상 묻곤 한다.



그리고 내가 중국을 더 제대로 알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아주 엉터리로 중국을 본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은 있다.



우선 어떤 기레기들처럼 선입견, 편견에 사로 잡혀 중국을 읽다가 실수를 하는 일은 많지 않다. 우선 내가 5년전에 집필한 <달콤한 중국 : 어느 방랑자의 지독한 중국 읽기>는 지금에 와서 판단해도 엉터리 내용이 아니고, 나름대로 제대로 중국을 읽은 책이라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오마이뉴스나 다양한 매체에 쓴 중국에 관한 글들도 큰 오류는 없다는 자부심이 있다.



또 공무원이나 기업 등에서 중국 관련 일을 하면서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또 내가 만나는 중국 사람들과도 어지간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럴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도 내가 중국에 대한 일반 수준의 상식이 있다는 것도 그들과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원인 같다. 또 많은 지역을 다녀서 어지간한 중국 사람보다도 중국을 더 경험했다는 것이 그들이 나를 호감있게 보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나는 삼국지 관련 유적지, 중국 철학 관련 유적지, 중국 대장정 관련 유적지, 중국 속 한국인들 관련 유적지를 꼼꼼히 챙겨 다녔으니, 당연히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기초 환경을 갖고 있다. 또 자기 나라에 관해 십여권의 책을 쓴 사람이 있다면 부정적으로 볼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한국에 관해 수십권의 책을 쓴 박노자 교수를 보면 너무 정감있는 게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중국 사람들을 더 친숙하게 본 데는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당대 중국 소설을 좋아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는 대다수를 읽었다는 것이다.



만약 외국인이 공지영이나 한강의 소설을 읽었다면 반가울 것이다. 거기에 김영하나 황석영, 김훈의 소설을 읽었다면 어떤 기분일까. 혹여 조정래나 박경리의 대하소설을 읽었다면 더 느낌은 다를 것이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중국 당대 소설의 대부분을 읽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기 때문이다. 중국 소설을 읽는 이유는 차츰 설명할 것이다.


      



▲ 중국자본시장연구회에서 발표한 화면 금융이나 비즈니스 중심인 이 모임에서 필자는 주로 인문학적 정보를 수혈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 조창완



그러다가 참여하는 중국 전문가 모임인 '중국자본시장연구회'에서 인문학적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강의를 한번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좀 더 체계를 세우고, 중요한 책들을 다시 복기하면서 들춰봤다.



강의에 대한 반응은 좋았고, 국회 등에서도 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강의도 좋지만 책으로 써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 중국 문학사에 대한 책은 많이 출간됐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중국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중국 문학을 정리한 책들이다. 나에게도 허세욱 교수가 쓴 <중국 현대문학사>가 있는데, 이 책도 1940년대 소설까지 밖에 다루지 못했다. 잘은 몰라도 중국에서도 위화나 옌롄커 등 당대 작가들을 포함시킨 문학사는 없을 것으로 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고인이 되기 전에 그 사람의 작품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 소설에는 이전의 시대와 배경과 사람이 담겨있다. 루쉰의 소설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루쉰의 작품에는 1900년대 초반의 중국이 담겨있다. 사실 지금 중국 사람들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하려면 지금 중국 사람들의 소설을 읽는 게 가장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 당대 소설은 우리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재미가 없었다면 내가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서 중국 소설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국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차츰 설명할 것이다.


      



▲ 중국 소설 읽기의 가치를 설명하는 모습 중국 소설을 읽을 때 좋은 점을 소개하는 필자 ⓒ 조창완



향후 이 공간을 통해 나는 다양한 중국 소설을 소개할 계획이다. 우리 소설도 읽을 시간이 없는데, 웬 중국 소설이냐고 힐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중일은 물론이고 이제 세계 문학은 경계가 없다. 그런데 최근 한국 소설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새로운 작가군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일본 소설로 읽기 습관을 옮기는 현상도 있다. 소설이 무너지면, 결국 영화나 드라마, 게임 등 수많은 창작물은 뿌리가 썩는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람들이 좀 더 읽는 재미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중국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각기 나라라고 할 수 있는 31개의 성시는 서유기에서 나타나는 기기묘묘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들은 창작의 토대가 위태로운 사회주의 국가에서 신기하리 만큼 흥미로운 소설을 쏟아내고 있다.



또 그들이 묘사해내는 장면, 장면에서 나는 다양한 형태의 중국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사전에 그들을 알아둔 만큼 실제로 만나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또 그들이 웃는 것과 슬퍼하는 것과 혼돈하는 것의 실체로도 조금씩 근접할 수 있었다.



연재로 쓸 이 글은 그런 가이드 역할을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중국 소설 읽기가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자료 관련 내용은 연재를 통해 하나하나씩 자세히 소개할 계획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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