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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讀用書> 인문학 어떻게 친해질 것인가

<독서-7> 커가는 인문 독서의 필요성

by 조창완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사람 간의 관계다. 가족, 학교, 직장, 사회 등 어디에서나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의 관계 만큼 힘든 것은 없다. 자신이 가만히 있어도 옆에 사람이나 상사, 심지어는 후배들조차 정치를 하려고 드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되는 게 세상살이기도 하다. 이런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몇단계 있을 것이다. 우선 자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척도가 되는 자존감, 위기를 만났을 때 그것을 회복하고 기회로 만드는 회복탄력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다음은 사람과의 관계 설정이다. 이런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만날 때, 진솔하고 성실하게 만나는 가도 있고, 말이나 작은 습관도 사람 관계에 영향을 준다. 특히 친구 관계는 더 중요하다. 다음은 사회 관계들이다. 직장 동료와의 관계, 고객 관계 등 수많은 관계가 있다. 이때 인정을 받으면 사회에서도 잘 성장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인정 받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상당 수의 조직이 업무능력이나 인간관계 보다는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좋은 줄을 타는 이들이 잘 승진한다고 생각하는데, 틀린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그런 측면이 작용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때 꼭 필요한 것이 ‘인문 독서’다. 인문 독서란 무엇일까. 인문독서를 이해하려면 인문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전적 정의로 인문학(人文學 , humanities)은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自然科學)에 대립되는 영역으로,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한 학문이다. 미국 국회법에 의해서 규정된 것을 따르면 언어(language), 언어학(linguistics), 문학, 역사, 법률, 철학, 고고학, 예술사, 비평, 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이 이에 포함된다.


너무 넓은 범위인데, 이걸 다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인문학을 공부해왔다. 태어나자부터 언어를 배웠고, 학교에 들어가서 배은 상당 부분이 인문학인 것이다. 수업의 절반 이상이 인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배웠는데, 따로 인문독서를 하라고 하면 좀 애매할 것이다. 맞다. 한 학자가 철학의 한 부분을 보기도 힘든 게 공부인데, 이 전반을 어떻게 독서로 채우라는 것인가. 그래서 쉽고도 어려운 게 인문독서다.

그런데 다행인게 우리나라에는 인문 독서의 좋은 가이드가 있다.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은 한국에서 인문독서의 좋은 가이드가 된다. 이 시리즈는 서울대 인문학부가 숙고해서 내놓은 고전 리스트인데, 2007년부터 2년여에 걸쳐서 이 책을 쉽게 풀어내는 만화로도 작업되어 중학생 이상이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만화라고 하지만 워낙 중대한 고전의 핵심을 꺼내놓아서 결코 쉬운 읽기는 아니다. 인문 시리즈의 결정판 답게 동서양에서 꼭 읽어야할 인문학 책을 잘 정리해 놓았다. 이 리스트에는 헤로도토스 <역사>, 플라톤 <국가>,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애덤 스미스 <국부론> 등 서양 인문서는 물론이고, <도덕경>, <논어>, <맹자>, <사기열전> 등 동양 고전이 있다. 또 정약용의 <목민심서>, 유성룡의 <징비록>, 이황의 <성학십도> 등 우리 고전은 물론이고, 박은식의 <한국통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최제우의 <동경대전> 등 근대 사상서들도 포함됐다. 여기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프로이트 <꿈의 해석>, 뉴턴 <프린키피아> 등 과학서적이 망라되어 있다. 이밖에 철학, 경제학 등에서 주요서적이 있다. 당연히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를 나는 뉴턴 <프린키피아>에서 인용할까 한다. 그는 유언에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나는 모른다. 나 자신에게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소년일 뿐이다.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며, 내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나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가끔씩 자그마한 돌과 예쁜 조개를 찾으며 즐거워했을 뿐이다.”고 말했다. 그에게 만유일력이나 망원경의 발견이 그저 자그마한 돌이나 예쁜 조개를 발견했다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인류의 학문이 발달되어 있다고 하지만 아직 인간 뇌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발견한 것과도 비견된다.


이 인문 시리즈는 만화가 아니더라도 리스트 자체로 세상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시리즈다. 따라서 스스로나 아이의 독서 목록을 만들 때 잘 활용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만화든 원전이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 시리즈를 선정할 때, 과학적 이해를 상당히 중시한 느낌이 들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라 해도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다른 분들도 굳이 이 책들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해서 좌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문독서라는 단어를 말하면 필자는 ‘수유 너머’와 ‘감이당’을 이끄는 고미숙 작가를 떠올린다. 대학에서 전공이 독문학이지만, 대학원에서 국문학으로 바꾼 고미숙 작가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재해석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통해 알려졌고, 지금은 책과 강연으로 우리 인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다. 자신의 직업을 ‘고전 평론가’라 칭하고, 다양한 인문고전을 풀어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고작가는 <열하일기>와 들뢰즈로 시작해 임꺽정, 동의보감, 윤선도, 루쉰, 주역 등을 섭렵하고 있다. 이런 리스트에서 나타나듯이 고작가의 지식체계는 다양하게 확장되어 가는 상황이다. 고작가의 특징이 있다면 지식을 같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남산의 북단인 필동에 있는 건물에서 감이당을 꾸리고 있다. 감이당은 다양한 인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이다. 주역 8괘 중 감(坎)괘는 물을 뜻하는데, 물은 존재와 우주의 근원을 뜻하고, 이곳은 그 것을 탐구하는 배움터라는 뜻이다. 이곳의 비전은 도심에서 유목하기, 세속에서 출가하기, 일상에서 혁명하기, 글쓰기로 수련하기 등인데 모순된 말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공간이다. 지방에서 공부하러 온 이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등 자체적으로 의식주를 같이 하는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곳이다.


감이당의 기본 정신은 인문학적 삶을 가장 잘 보여준다. 고미숙 작가는 이 공간에서 ‘읽으면 써라! 쓰기 위해 읽어라’라는 확실한 모토를 가지고 살아간다. 여기서 읽으라는 의미는 인문 독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왜 인문독서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앞서 말했던 인간관계는 자신이 아는 만큼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직장에서 수많은 지침이 있어도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으면 안된다.

‘직장 정치 하지 마라’, ‘성실하게 일하라’, ‘윗 사람에게 예의있게 대해라’, ‘아랫사람을 무시하라’ 등 수많은 말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정치가 없는 곳은 없다. 성실하게 일하라고 한다고 해서 몸이 상할 만큼 일을 하면 안된다. 또 윗사람에게 예의를 너무 차리면 아첨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기준을 갖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중용(中庸)이라는 말도 그 기준을 말했다. 그런데 이 중용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정자(송나라 유학자 정호와 정이 형제)는 중용을 말할 때 “기울지 않으면 중(中)이라 하고, 변하지 않으면 용(庸)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길이고, 용은 천하의 일정한 도리이다.”라고 말했다.

20180130_112036.jpg 2019년 필자가 주관해 떠난 산동인문기행 당시 맹자를 모신 아성전 앞에서. 산동은 공자, 맹자, 관자, 묵자 등 수많은 사상가를 배출한 인문학의 보고다


결국 이런 글들을 끊임없이 읽으면서 사람들은 기울지 않아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지켜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인문 교육의 힘이다. 세상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단이다. 이 독단이 황제에게 나타나면 제국이 망하고, 왕에게 나타나면 국가가 위기에 빠지고, 지자체장에게 빠지면 지자체가 위험해지고, 가장에게 나타나면 가정이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과거부터 황제나 왕들은 당대에 가장 지식이 넓은 이를 불러서 교육하게 했다. 조선시대 왕들은 이런 교육이 당연히 필수였다. 왕들은 왕자 시절에 좋은 스승을 만나 배우는 것 뿐만 아니라 왕이 돼서도 신하들과 함께 지식을 나누면서 어떻게 정치할 것인가를 논했다. 이것을 경연(經筵)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유교가 도입된 고려시대 후반부터 이 제도가 도입됐고, 이 자리에서 논의된 것은 유교경전이었다. 이 자리에서 왕에게 강의를 하는 역할은 문형(文衡)으로 불리는 홍문관의 수장 대제학이 중심이 되어 진행했다. 또 의정부의 3정승과 6조의 판서, 승정원의 승지 등도 겸임 관원으로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보여주는 능력은 그 사람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연은 학문을 좋아했던 대표적인 왕은 세종과 정조이다. 이 시기에는 당연히 홍문관은 물론이고 집현전(集賢殿)이나 규장각(奎章閣) 같은 학문연구기관이나 문서 편찬기관이 빛을 보기도 했다. 이 두 시기의 특징은 유교는 물론이고 자연과학이 같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세종 때는 장영실이나 이순지, 이천, 정인지 같은 이들이 있었고, 정조 때도 홍대용이나 정약용이 유학자이자 과학자로서 큰 공헌을 했다.


인문독서의 또 다른 힘은 공감하고, 연대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좋은 친구를 만나서 더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다. 이 과정이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공감이 필요한 이유는 지구의 미래와도 직결되어 있다. 지구가 만들어진 이래 지난 100년은 가장 변화 큰 시간이었다. 이제 도시의 중산층은 과거 황제가 쓰는 만큼의 에너지를 쓴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1800년도 지구 인구수는 총 10억명 가량이었다. 그런데 지금 인구수는 78억8천만명 가량으로 8배 가까이 증가했다. BC 8000년 세계인구가 50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증가속도는 급속히 빨라졌다. 문제는 근대 전기의 발견, 자동차의 발견 등으로 한사람이 쓰는 에너지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많이 쓰는 것이 미덕이라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그 속도를 제어하기 힘들게 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공존하기 위해 인류 스스로 쓰는 에너지를 줄이지 않으면 공멸의 길로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화해와 이해로 가는 길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런데 인문학은 강의 등 교육보도는 독서를 통해 체득해 가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따라서 인문 독서가 필요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정도까지는 보통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터스텔라’ 등 지구가 오염되어, 외계를 찾아야 하는 수많은 경고성 콘텐츠를 봐왔다. ‘아일랜드’, ‘매드맥스’ 시리즈, ‘더 타이탄’ 등은 물론이고 어릴적 추억 속에 만화 ‘미래소년 코난’도 그런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사실상 지구가 오염되어 지구를 떠나야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이야기다. 천문학 등 우주연구를 시작한 이래 지구 만큼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가진 항성이나 행성을 발견한 적은 없다. 거기에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만드는 항성 중 가장 가까운 곳은 4.2광년 떨어진 센타우루스자리프록시마별이다. 이 거리는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27만 배 가량이다.


결국 인류는 지구에 살거나 아니면 화성같이 척박한 땅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결국 이런 곳으로 갈 수 있는 인류의 숫자도 극히 한정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노력을 통해 지구를 정화시켜야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인류 전체가 노력을 해도 쉽지 않다는 예측을 내놓는다. 그런데 지금도 대부분의 국가는 에너지 사용 확장을 위한 개발에만 열을 올린다. 이 상황을 구할 수 있는 공감대는 인문학적인 지혜가 아니라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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