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봄 중국에서 살 때인데, 일이 있어서 아내와 잠깐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골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것이다. 급히 내려가니 아버지는 영광종합병원 응급실에 의식이 없이 누워 계셨다. 아버지 처음 쓰러진 것은 내가 고향마을에서 단기사병을 하던 1990년이다. 당시 아버지 연세는 지금 나랑 비슷한 만 53세셨다. 그 중간에 몇차례 쓰러지셨고, 이번 쇼크는 간에 우회혈관을 낸 아버지에 너무 위험한 것이었다. 병원 응급실에 있다가 이틀 후 아버지는 젊은 의사의 암브백(수동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암부백을 떼자 아버지는 미동도 없이 호흡을 멈췄고, 우리는 장례를 치렀다.
장례가 끝내고, 작은 방에 가족들이 모였다. 아버지 유산에 대한 정리회의를 겸했다. 그런데 그날 아내는 저희는 일체 상속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은 형제자매들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상속을 받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아내에게 진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 나중에 사업을 하다가 돈이 궁할 때는 그때 유산을 좀 받을 걸 했지만, 그렇게 얻은 돈은 쉽게 사라지는 것을 알기에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사실 내 친구를 비롯해 처가나 우리 세가족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다. 일년에 공식적으로는 4번 모이는 가족 모임이 가장 기다려지는 행사 가운데 하나다. 우리 가족은 형제만 모이는 추석, 설 외에 아버지 기일과 여름 어머니 생신에 고향 집이나 콘도 등을 잡아서 20~30명 정도가 모임을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술주정이 있는 이도 생기지만 가족 간에 큰 소리는 잘 나지 않는다. 대신에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이 닥친 형제나 조카들이 무사히 그 일을 풀어가길 마음으로 기원한다.
우리 7남매는 1960년생부터 1975년까지 15년 사이에 태어났다. 5째로 차남인 나는 둘째누나와 친했다. 말도 안되지만 둘째라는 모티브 때문이기도 했다. 누나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5.18항쟁을 겪었다. 아마 고1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누나는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를 탈 때 고생을 한다. 지하철도 잘 타지 못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더욱이 지난해 둘째매형과 셋째매형이 돌아가시면서 안양에 사는 누나들은 답답함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면, 우리 나중에 시골집에서 같이 삽시다하면 별로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시골 집 옆에 서재가 있는 작은 집을 짓고 살고 싶어한다. 글도 쓰고, 일도 하면서 살고 싶다. 그냥 찾아오는 벗들이 있다면 막걸리도 들이키면 된다. 우리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을 사실 돈이 한푼도 들지 않는다. 주변은 여동생이 친환경 농사를 20년가량 해서 유기농 식재료가 넘치고, 집 바로 앞에 있는 마을회관에는 정기적으로 먹거리부터 놀거리가 제공된다. 주소만 옮기면 이 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다.
물론 도시 만큼 활발한 움직임은 없겠지만 그것들이 뭔 대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 형제들을 만나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 크다. 어머니는 4년전 고향에 새로 집을 지으셔 자식들이 나중에 살 수 있게 준비해두셨다. 대지도 넓게 허가받아 내가 원한다면 마음대로 집을 지을 땅도 배정해두셨다. 물론 내 꿈에 대해 아내는 마뜩해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서울에 와서 살고, 지금도 지인들이 서울에 사는데 당연한 일이다. 또 시골은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것도 아내가 시골을 꺼리는 이유다. 더욱이 아무리 친해도 시댁은 시댁일 뿐이다.
하지만 아들이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서 움직이면 우리 부부는 지금 사는 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명확치 않다. 물론 내가 계속 일한다면 도시에 있을 이유가 있지만, 나는 요즘 도시보다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이야기가 마뜩치 않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형제간의 우애가 깨진 집도 많다. 이런 집들은 분명히 가족관계의 회복을 원하는 곳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에 정직해지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양창순 교수는 미안한 일이 있다면 부모자식이든, 형제관계든 분명히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하고 개방적인 대화가 회복의 첫 번째 단계다. 서로의 감정과 관점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갈등의 원인과 그로 인한 상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족 간에 공동의 이해와 목표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필자의 고향 집 부근에는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못해 노는 땅들이 많다. 이런 땅은 세계 최고 품질의 식자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여름 가족 모임에서 가족들과 동네 투어를 한 적 있다. 이곳에 원래 우리 고향 집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어떤 고인돌이다. 아울러 이곳에서 만들어내는 식자재는 최고의 식자재다 등. 가족들도 흥미를 가졌다. 누나들도 나이가 65살쯤 되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다. 시골에서 어느 정도 수익을 낼 수 있다면 고향행을 마다할 것 같지 않다. 물론 그 기획을 얼마나 호기심있게 만드는 가도 중요할 것이다.
사실 가족 관계는 돈이나 마음 등으로 힘들어질 수 있는 유리같은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 앙금이 평생을 보지 않게 하는 사례가 많다. 서양 심리학에서 말한 카인 콤플렉스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다 이런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그런 관계에서 관용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용서는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용서는 시간이 걸릴 수 있으므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내가 사과했는데, 그것을 받지 않는다고 화내면 관계는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가족플랜 예시:우리남매펜션 기획
의도: 남매들이 도시를 떠나 고향에 가고 싶을 때 정착할 수 있는 공간 마련. 평소에는 임대를 통해 수익 창출. 출자자들이 가족 휴식이나 이후 정주 공간으로 전환
구조: 2층 7실(60방~75방),공동식당, 북카페, 명상실, 황토방
펜션 마케팅: 동창 카페에 자연스러운 알림, sns 등
비용: 건축비 3억원(남매 출자금 1억4천만원, 기타 대출)
수익정산: 인건비, 관리비 등 지출 후 대출금 우선 상환. 완료후 균등 분배. 권리는 상속
운영방식: 가족 회원은 1일 이용료 5천원(운영 참여시 면제), 외부 이용객은 1일 7만원, 장기 외부 투숙자 1일 3만원
장점:2천만원으로 노후 대책 완료, 월 150만원 수익 창출 가능한 간단한 일자리 기획, 디지털헬스케어를 통한 건강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