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을 그리는 나

<리틀 포레스트:사계절, 2017>

by 초생


상처와 수용 사이, 나는 그 경계선에 있다. 모든 걸 받아들이는 것 같다가도 통제 밖의 분노를 터뜨리고 또 회피했다. 경계를 들락날락하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며 좌절했다.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나를 수용하는 것도 ‘수용’의 과제였다. 뫼비우스의 띠같이 돌아가는 부정적인 생각을 끊으려면 조금 더 기술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가 느린 영화를 보는 거였다.


담담히 흘러가는 영화에 젖어 들면 그래, 이렇게 하루를 사는 거지 뭐 했다. 사람도 동물처럼 단순함이 먹힐 때가 있다. 때로는 설거지나 운동 같은 몸의 움직임이 상처 속에서 맴도는 생각의 회로를 튼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사계절>은 그렇게 찾아, 내가 습관처럼 보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에서 '엄마의 편지' 내용 중 나선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 언제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수용이라는 지점을 향한 노력이 자꾸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때, 리틀 포레스트를 찾아간다.






수용; 언저리에서

13_ 나선을 그리는 나
영화 <리틀 포레스트:사계절, 2017>




뭔가에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거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그런 거면 조금 낫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옆으로도 자랄 수 있다.


내가 그리는 원도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나선은 커지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나더구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2017>, 엄마의 편지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자마자 다음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은 눈이 부셨다. 어느 것 하나 수고 없이 거두어지는 건 없었다.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보이는 노동의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머리를 맞은 듯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정성이다, 나는 내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내 삶을 나는 막 다루었다.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도, 도피할 용기도 없는 내 인생이 싫다고 투정 부렸다. 긍지 없는 열심으로 소진만 되는 삶은 이제 싫다고, 하찮은 일을 위한 노력은 안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이 그렇게 하찮은가?' 매 끼니를 위해 채소를 꼼꼼히 씻고 요리를 하며 식후 설거지를 하는 일이 귀찮기는 해도 하찮지는 않다. 그건 아는 내가, 왜 내게 주어진 일로써의 일과 그에 따른 노동을 평가절하할까. 영화 속에서 받은 감동의 실체나 눈앞 현실이나 먹고 일하며 사는 삶의 반복일 뿐인데.


보잘것없는 삶을 만드는 것은 내 태도였다. 그럴싸한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솟는 그래프 같은 삶만이 정답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목적지를 모르겠으니 밋밋한 삶은 반복되었고, 나는 점점 더 초조해져 갔다. 하루하루 기회를 잃는 것만 같아 영혼 없이 일했고, 발생하는 모든 부수적인 일들을 비생산적이고 치워버려야 할 것으로 치부했다.


그런 삶에 지쳐, 쉼터를 찾아 튼 영화였다. 2시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 동안 온종일 정성스레 밥을 차려 먹고, 계절의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수고를 들여 땀 흘리는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웠다. 생기지도 않는 꿈을 찾느라 현재에 충실하지 못했었어서, 반복되는 일상이 내가 발 딛고서야 할 목적지임을 잊었었어서.




나도 '원'이 아닌 '나선'을 그리고 있는지 모른다. 여러 이유로 원점을 맴도는 삶을 사는 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눈 떠보면 또 제자리라 절망했던 내 삶이 실은 점점 나선을 그리며 확장되고 있었다.


나선을 빙글빙글 도는 인생 궤도 속에서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도착한 원점은 사실 더는 원점이 아닐 수 있다.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달라진 나를 발견한다면, 그 작은 성장에도 기뻐하는 삶이 정말 아름다운 게 아닐까. 나아진 것 하나 없는 모습이라 해도 묵묵히 자신을 믿고 시간을 들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나선을 길고 넓게 그리고 있다는 증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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