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그만두었고, 어쩌다 유럽에서 한 달 살기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사적인 이야기를 어렵게 적습니다. 제가 연재하던 작업들을 잠시 멈춘 이유에 대해 적어도 어딘가에는 설명을 해놓자고 생각해, 공지 아닌 공지글을 쓰게 되었어요.
요즘 저는 활동하던 플랫폼들에 그림도 글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제 표현으로 저를 풀어놓았어요. 하던 일도 그만두었습니다. 최근 남편의 일로 해외에 있었던 것을 포함해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일입니다. 다시 본업으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 상태로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어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이 전하는 이야기 중 '우리는 스스로를 훈육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공감하지만, 저는 제가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채찍질만 하는 걸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제 생각이 틀렸다고 깨달을지언정 아무것도 나를 옥죄지 않는 시공간, 이 두 번 다시없을 때를 꼭 쥐고 있어요.
지금 저는 온실 속에 있어요. 살면서 처음 맛보는 상태에 행복하고 또 여전히 불행합니다. 안전하다는 사실을 뇌는 쉽게 망각하거든요. 집답지 않은 집에서 물어뜯기고 남은 흔적으로 저는 모든 것 앞에서 저 자신을 괴롭혀왔습니다. 생존을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밖에 모르는 저였으니까요.
최선을 다함에도 비난을 받고 비교당하며, 우월한 아이를 향해 박수 쳐라 강요당했던 때는 어린 시절을 넘어 결혼 직전까지였어요. 지속되는 정신적 학대에도 스스로를 다잡으려 노력해왔지만 때론 역부족이었죠. 저는 아직도 저를 죽어라고 미워합니다. 제 그림도 싫었고요.
예술 자체에는 애정이 커요. 이번 유럽 여행 때에도 매일 도서관에 가 화집을 보고, 길거리 음악회를 즐겼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 작업은 사실 엄청 자유로운 그림이에요. 추구하는 걸 저는 잘 못하니 속앓이를 했었죠.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그림을 꾸준히 그리는 작가들과 비교하며 '넌 틀렸다' 평가하면서요. 동시에 구시대적인 이유로 대놓고 가족에게 부정당해왔기 때문에, 잘하고 싶은 일에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춤할 때마다 그 생각을 꾸역꾸역 잘라내 왔지만 항상 혼란스러웠어요.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아요. 이번 기회에 타지에 머물면서 가장 날 것의 나와 마주하고 '내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일지' 알아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그리 쉽나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비록 지금은 많이 두렵고 자신도 없지만요. 이 모든 현상들이 그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 자아상에 대한 이야기겠죠. 그래서 사실 작업이 좋니 아니니를 넘어, 나를 관대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걸 거예요.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해야 해서 하던 것들은 잠시 멈추고, 순수하게 좋다고 느끼는 것에만 집중하려 해요. 지금은 그것도 쉽지 않아 졌지만 그만은 노력해야겠죠. 기존의 강박을 내려놓으면, 반복되는 압박에 바닥을 찍은 제 임계점이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해요. 그때는 맘속 부정적인 생각을 더 자주 이길 거라 믿어요.
입시생들을 가르쳤을 때,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독려하면서 내심 죄책감이 들었어요. 학창 시절 최선을 다하는 경험과 자세는 중요한 자산이지만,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러한 삶을 살 줄 몰랐으니까요. 저는 이제라도 그것에 대해 잘 알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이제 저는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요. 그리고 저를 내려 깎던 것들과도 멀어졌고요. 감사하게도 시아버님께서 저를 그림 그리는 아이라고 이야기하세요. 제 그림이 좋다고 엽서를 가져가시고 해외에 계신 친척분들께도 보내셨어요. 마음이 꽉 차면서 무거워요.
이제 저와는 수업하는 게 좀 더 어울릴지도 몰라요. 동경하는 것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한 번 저를 데리고 시험 기간을 가져보려 해요. 지금껏 하기 싫은 일, 때론 저를 파괴하는 일까지 열심히 해왔으니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아버님을 떠올리기 직전까지는 글이 부정적으로만 흘러갔고 제 생각도 그러했는데, 지금은 희망을 가지고 싶어 져요. 누군가에게 지지받는다는 건 이렇게나 큰 힘을 지니나 봐요.
그동안 글과 그림에 통일성을 유지하려 노력해왔는데, 그것보다 더 집중해야 옳은 것이 생겼어요. 이전 작업 때문에 저를 구독하신 분들께 저의 자유로움에 대해(?) 양해를 부탁드리려고 솔직한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브런치에는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정리하는 글을 주로 쓰고, 영화에 대한 글을 간간히 올릴 것 같아요. 그림 연습은 계속하고 있는데 업로드는 아직 못 하고 있네요. 뒤죽박죽이겠지만 인스타그램과 그라폴리오에도 차츰 올릴 예정입니다.
저에 대해 세밀히 연구해보고 품었던 소망을 실현할 힘도 만들 수 있도록, 즐겁게 시행착오를 거쳐볼게요.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또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