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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생 Aug 16. 2019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만난 ‘매너리즘 사조’

동경과 무기력 사이에서 1


사촌 언니는 촉망받는 예술가다. 언니가 하는  작업다운 작업이고, 온전히 지지받는 환경에 있는 언니 같은 사람이 창작을 일로 삼을  있다고 어려서부터 생각했었다. 그렇게 대학  처한 상황과 타협해 영상 분야로 전과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누구나 여러 경로를 통해 자기 작품을 내보일 수 있게 됐다. 창작은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었는데, 난 아직도 활짝 열린 새장 구석 웅크린 새 같다. 지긋지긋한 비교. 동경은 언제나 무기력으로 매듭지어진다.







그런 상태로 떠난 여행이었다.








영화 <Sink or Swim>-가라앉는 인생 가운데 수중발레에 도전하는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





깊은 물에 빠지면 그대로 가라앉거나, 허우적대는 꼴일지라도 헤엄치거나, 둘 중 하나다. 파리 행 비행기에서 영화 <Sink or Swim>을 보며 울고 웃었다. 무기력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꼭 나 같아서.










냉동실 같던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해 남편 학회 일정에 맞춘 '한 달 유럽 살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의외의 지점에서 내 상태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찾아 나갔다.


정신없는 2주, 여유로운 2주를 반반씩 보냈고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크고 작은 도시 속 기억의 파편들을 이제 글로 정리하고 있다.












각 국의 미술관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과거 르네상스에서 20세기를 거쳐 현시대까지의 미술 작품들을 조금씩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림 뒤 예술가들이 무엇을 동경했는지, 혹은 무엇에 좌절했는지에 이끌렸다. 이는 과거의 그들과 내가 공유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화풍에 대한 고민, 뛰어난 화가를 사모하는 마음, 당대 활동하는 예술가들과 주고받는 영감의 실체로써 그림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Sink 아닌 Swim을 택했을까.’ 나는 그들에게 내 마음 상태를 투영하고 있었다.
















이번 화는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매너리즘 미술 사조'에 관한 생각을 정리했다.








매너리즘(Mannerism)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기 전 '매너리즘 사조'가 있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3대 거장이 르네상스 미술의 정점을 찍고 난 후 등장한 사조다.



일반적으로 매너리즘은 틀에 박힌 방식을 취함으로써 독창성을 잃는 경향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와 반대로, 완벽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고착화된 형식에 반한다는 의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ㅣ틴토레토, <최후의 만찬>ㅣ파르미자아니노, <목이 긴 성모>



3명의 천재가 이룬 전성기인 르네상스 시대에 사실적이고 완벽한 비례와 구도의 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미켈란 젤로의 <천장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그리고 그 이후, 르네상스의 그늘에서 '매너리즘 사조'가 생겨난다. 르네상스 다음 세대는 이미 절정에 달한 이전 시대의 완벽한 그림을 넘어서는 발전은 고사하고, 답습하는 것조차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르네상스 이후 세대가 겪은 고충이 그대로 '매너리즘 사조'에 드러난다.


이들은 균형과 조화, 보이는 아름다움을 재현했던 르네상스 형식을 버리고, 불안정한 구도와 과장되어 기괴하기까지 한 표현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끄집어냈다. 나란히 올린 다빈치와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을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마지막 그림인 매너리즘의 대표작 <목이 긴 성모>에서도 길게 늘어진 아기 예수와 성모의 몸, 우측 하단 비정상적으로 작게 놓인 남성을 통해 어긋난 신체 비례와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폰토르모, <예수의 시신을 눕힘>ㅣ로소 피오렌티노,  <음악의 천사>ㅣ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이 외에도 음울한 분위기, 격정적인 표현을 한 매너리즘 그림들이 많이 있다. 위 오른편 그림의 칼을 든 여성은 성경 인물 유디트로, 얼굴은 젠틀레스키 자신이다. 목을 베이는 남성은 자신을 성폭행했던 스승의 얼굴로 바꿈으로써, 화가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한 작품이다.


르네상스 미술이 이룬 최상의 완벽함을 거부하고 마음속 이상을 망가뜨리듯 표현한 매너리즘 작품들을 보면서, 그 독창성 뒤에 숨겨진 이들의 심정을 알 것만도 같았다. 당시 여러 미술사학자들이 과소평가했듯, 모두가 동경한 천재들로부터 세워진 기준에 그들은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눈앞에서 직접 매너리즘 그림을 보았을 때 느껴졌던 어두움, 불안정, 비통함,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을까.


16세기 종교전쟁과 과학 기술의 급변기로 불안정했던 유럽의 시대상과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완벽함 앞에서, 그들이 Sink 아닌 Swim을 택한 결과가 이 매너리즘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일탈이 내 눈엔 정말 아름다웠다. 전시 공간을 나서기 전 그림이 어땠냐는 가이드의 질문에 나 혼자만 좋다고 말한 것만 봐도 매너리즘에서 고전적인 미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데에 더 큰 아름다움이 있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매너리즘은 그 당시 한 고전주의자로부터 '미치광이와 같은 형상들'이라는 혹평도 받았다. 본래 매너리즘의 어원인 '마니에라(maniera)'는 '보고 따를 만한 방식'이란 긍정의 의미였고, 르네상스 3대 거장의 그림들이 바로 이 마니에라로 여겨졌다고 한다.



매너리즘 미술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과 정의들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위기와 혼돈의 시대에 대한 불안의 반영'이라는 영국 미술사가의 해석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마니에라 뒤에서 허우적거릴지언정 가라앉지는 않았던 사조'라고도 덧붙이고 싶다.





*다음 화에는 19-20세기 몇 화가들의 이야기를 이어서 하려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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