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무작정 백수가 됐다.
퇴사를 생각했던 건 사실 입사했을 때부터다. 취준생 모두의 염원이 아닌가, 대기업 입사! 전공 살려 개발자로 인턴하고 운 좋게도 정규직 전환의 기회까지 주었던 나의 첫 회사. 학부생일 때도 개발을 별로 안 좋아했던 사람이 개발로 먹고사는 회사에 들어갔다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여기에 왔던 건 기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맞지 않는 아버지의 양복을 입은 것처럼 모든 게 어색하고 두려웠다. 내가 개발한 코드가 실제로 서비스되는 앱에 반영이 되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방대한 코드의 늪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아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 일도, 새로 추가될 기능이 기존 기능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알아차려야 하는 것도. 모든 일이 나에겐 벅찬 일투성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신입 레벨 1인 나에게 거창한 걸 시키지는 않았지만 수정한 첫 코드가 실제로 반영이 되었을 때의 무서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짜는 게 맞아...? 이거 merge 되어도 되나...?' 하는 그런 두려움.
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뭐든 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만큼의 몫을 해내기 위해 그래도 3년 반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던 것 같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철마다 돌아오는 새로운 기술들을 확인하고 앱 코드가 이렇게 많을 수 있나 싶은 정도의 회사 코드 더미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큰 체크리스트와 그 체크리스트에서 파생된 작은 체크리스트까지 만들어가며 뭐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동기들에게 정보 요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관련 정보를 빠르게 캐치하는 사람이 되었다.
회사 코드가 눈에 익고, 어느 정도 내 의견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연차가 됐다. 내가 실수해도 QA 단계에서 잡힌다는 믿음과 또 내가 그 정도로 실수하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인턴이었던 내가 3년을 자라 새로 오신 인턴분의 멘토가 되었다. 무섭다고, 안 맞는 옷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으면서 퇴사를 결심했다. 그것도 한창 배울 거 많고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인 3~4년 차 어느 날.
언제부턴가 회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지고 있었다. 기존에 내가 담당하고 있던 서비스는 사업상의 이유로 실제로 사용자들이 사용할 수 없는 기능이 되었고 결국 나는 나 스스로 할 일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래봤자 내부 개발 과제를 조금씩 하는 게 다였지만. 이런 날이 하루 이틀 쌓여가자 자꾸만 개발이 아닌 다른 것들에 눈이 갔다.
'이렇게 평생 개발로 먹고살 수 있을까? 나는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이 뭘까? 이렇게 억지로 8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아무것도 못 하는 하루하루가 정말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일까.'
이직이 아닌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몇 달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평생 개발자로 먹고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무작정 나가기엔 매달 통장에 쌓이는 월급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그래도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퇴사해서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해보는 게 미래의 내가 봤을 때도 후회가 없겠단 생각까지 들었을 때 가족들에게 퇴사 의사를 고백했다. 물론 부모님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사는 거라며 쿨하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남들에게 퇴사하고 싶다고 털어놓으면 대체 왜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두냐고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 정도로 내 선택이 경악스러운 일인지 나는 오히려 상대에게 묻고 싶었다.
'oo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말을 꺼낸다면 십중팔구 퇴사 이야기라는 얘기가 있었다. 나도 그렇게 말문을 텄고 짧은 회유 시간이 있었지만, 퇴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월급의 달콤함에 빠져 이걸 정말로 버리고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걸 해보겠다는 결심, 뭐 여기 아니어도 나는 어떻게든 먹고 살 거라는 막연한 희망. 두 가지가 합쳐져 나는 스물여덟의 4월에 백수가 됐다.
사실 위에 써둔 얘기가 누군가에겐 가소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고작 그런 거 때문에 그 좋은 회사를 나가서 백수가 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벌어 먹고살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난 3년 반 동안 치열하게 살았던 만큼 앞으로도 치열하게 내 삶을 살아낼 것이라는 점이다. 퇴사는 살아갈 날이 기대되는 삶을 살고자 용기 있게 내딘 첫 걸음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무작정 떠나온 제주에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