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람 최승선 021] 아빠의 청춘, 아빠의 낭만
우리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는 '낭만에 대하여'. 그는 자타공인 낭만뽀이다. '어르신 카톡 짤'을 퍼다 나르는 사람이 아니고, 직접 찍은 사진에 직접 지은 시를 적어 공유하는 크리에이터다. 조경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꽃을 가까이하고 자연과 동화되어 사니 그에게 시상은 떨어질 날이 없다. 낭만가이는 육아도 낭만적으로 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상황상 아빠 혼자 우리 남매를 키워야 했다. 아빠는 '남자 치고'가 아니고, 정말 요리를 쉽게 뚝딱뚝딱 잘했다. 딸의 머리 묶는 일은 처음이었으므로,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보며 머리 묶는 법을 독학했다. 주말이면 자식들을 데리고 놀러 간다거나, 비가 온다는 이유로 마중을 나간다거나, 공개수업에 얼굴을 비치는 일까진 무리였다.
살림과 농사를 맡았던 그는 어린이날이라고,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한 날을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주 안 하지는 않았고, 어린이는 그날들이 모조리 기억에 새겨져 있다. 그날들의 공통점을 생각하면 단연 '낭만가이'스러운 행보였다. 언제나 계획 없이 훌쩍 떠났고, 다른 가족들은 쉬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다. 방에서 얌전히 TV를 보고 있던 남매를 아빠가 마당으로 불러냈다. 일찍이 해가 진 밤이었다. 귀찮음에 "왜!!!!!"를 몇 번이나 외쳤지만 그는 빨리 나오라고 성화였다. 마당에 나가니 스파클러(불꽃이 파바박 튀는 그 쇠 스틱이 맞다.)들이 흙바닥에 꽂혀있었다. 어두운 밤에도 아빠의 신난 얼굴이 보였고, 우리는 그보다 더 신난 얼굴과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뛰어갔다.
아빠는 바닥의 스파클라들에 불을 붙였고, 남매에게 양손에 하나씩의 스파클라를 쥐어주었다. 썩 다정하지 않았던 남매였지만, 불꽃을 옮기느라 서로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불꽃이 튀기 시작했을 때, 도파민이 날뛰었다. 스파클라엔 그런 명령어라도 있는 건지, 동그라미를 그리다 별을 그렸다. 아직 어린이였으므로, 불꽃이 손과 가까워질 땐 소름이 돋게 무서웠다.
그 일은 아빠에게도 뿌듯한 일이 되었겠지만, 후회되는 일이 되었을 테다. 그 낭만을 사촌동생들에게 선사했다가, 양평 집에 놀러 올 때마다 그들이 불꽃놀이를 하자 성화였으므로. 다를 바 없던 남매들도 해만 지면 아빠에게 불꽃놀이를 하자고 졸랐고, 징그럽게 졸랐으므로 낭만가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몇 차례 아비 부의 꾸짖을 갈을 당한 후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그러나, 낭만이었다.
그치만 최고의 낭만은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다. 나는 '산타'의 존재를 믿어본 적이 없다. '산타는 없다'는 걸 깨달을 일이 없었다. 우리 집이 크리스마스를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교회에서 선물 주는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크리스마스는 달랐다. 아빠가 트리를 만들자고 했기 때문이다. 이게 웬일인가!!!
트리를 만들자던 그는 마당으로 가서 톱을 들었다. 그리고 집 들어오는 길목에 1.5m쯤 되는 나무를 베었다. 나무가 들어갈 화분을 골라 흙을 담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혼자서 집 거실에 나무가 심긴 화분을 들였다. 미리 준비해 둔 조명과 반짝이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꾸미라고 했다. 그 트리는 여느 집 트리와 같이 날이 따뜻해지기 전까지 거실 한복판을 차지했다.
어느 날, 어떻게 트리가 치워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트리를 감고 있던 반짝이들이 아까워 오두막 지붕 아래에 주렁주렁 옮겨놨던 기억만 있다. 플라스틱은 썩지 않으므로, 원두막의 나무들이 삭아갈 때에도 그 반짝이들은 굳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