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람 최승선 020] 로켓배송이 안 되는 지역에선 못 산다니!
양평으로 이사 오던 날, 아빠와 삼촌과 남동생을 동원하여 셀프 포장 이사를 했다. 인천 집에서 모든 짐을 차에 싣고 냉면 가게에 걸어 들어가 식사를 했다. 나름 부평 사람들에겐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집이었다. 김치찌개를 먹을지, 순댓국을 먹을지, 감자탕을 먹을지, 냉면을 먹을지 고르다가 땀을 흘린 관계로 들어간 집이었다. 집에서 밥 먹으러 걸어갈 수 있는 날이, 후보를 고르는 사치스러운 선택권이 마지막인 걸 알고 있었다.
'이제 걸어서 편의점 가는 시대는 끝났네' 하며 삼촌이 웃었다. "괜찮아요"하며 나도 웃었지만, 그 괜찮다는 말의 의미는 불편함을 감내해야죠-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걸어서 편의점을 가지 못하는 게, 편의점도 시간이 늦으면 문을 닫는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성남에선 편의점 옆집에 1년을 살았고, 인천에선 아파트 단지를 4사의 편의점 6개가 둘러싼 곳에서 4년을 살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느 날의 새벽 2시였다. 잠이 오지 않았고, 배가 고팠다. 마침 오래간만에 야채가 있었으므로 가볍게 참치야채비빔밥을 먹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웬걸? 초고추장이 없었다. 포기하고, 상심한 마음을 친구에게 카톡으로 전했더니 편의점에 가보라고 했다. 그제야 여기가 대도시임을 자각했다. 어쩐지 두근대는 마음으로 편의점에 갔고, 누군가에겐 당연하겠지만 나에게는 놀라웠던 발견! 정말 초고추장이 있었다. 왜... 왜 당신이 여기 있나요...
그런 소스류는 펜션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나 있을 줄 알았다. 새벽에 초고추장을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마트가 코 앞에 있는데 초고추장을 발주하는 이유가 뭘까. 아직도 궁금하다. 그런 편의점을 아파트 계단만 내려오면 새벽 2시건, 4시건 갈 수 있다는 게 나는 여전히 놀랍다. 양평 사람들이 다 놀랍진 않을 것이다. 시내 편의점들은 새벽까지 열려있으니까.
첫 독립을 하고 나는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에서 아이스크림을 5만 원어치를 샀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2개씩 담았고, 퍼 먹는 패밀리 아이스크림도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담았다. 유통기한이 없으니까, 맘 편히 담았고 그중 절반 이상은 버렸다. 사실 집에서 군것질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럼 왜 그렇게 샀는가? 그게 다 그 '집 앞 편의점' 때문이다.
'집 앞' 편의점에 가는 길은 왕복 20분의 언덕길이다. 언덕을 올랐다 내려가면 편의점, 또 올랐다 내려오면 집. 그 편의점은 밤 11시에 문을 닫았는데, 10시가 되면 초조해졌다. 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것도 같은데, 조금 후에 먹고 싶어질 것 같은데 왕복 20분 갔다 와? 아이스크림 고르는 시간까지 30분, 시간이 얼마 없는데? 오는 시간은 마감 후에 와도 되니까 10시 40분까지만 정하면 돼.
몇 명의 친구들에게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락이 닿는 데로 물었다. '왕복 20분 언덕길을 지나 아이스크림 살? 말? 곧 편의점 문 닫음' 답은 기억이 안 난다. 꾹 참고 안 간 날이면 후회를 했던 기억뿐이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에 한이 맺혔다. 새벽에 이유 없이, 느닷없이 먹고 싶어 지는 요물 같은 녀석. 집 근처(도보 3분 이내의 정말 근처)에 24시간 무인 아이스크림 매장만 4개가 있고, 편의점도 6개가 있는데도 아이스크림을 쟁여둔 이유다.
여전히 나는 그곳을 '집 앞' 편의점이라 부른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도 '집 근처' 편의점이 두 개나 있는데 야트막한 언덕길로 왕복 12분 거리에 하나, 평지로 왕복 20분 거리에 하나. 모두 '집 근처' 편의점이다. '근처'의 의미는 '갈 수 있음'인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켓배송이 되지 않는 지역에선 못 살겠다고 한다. 나도 로켓배송과 샛별배송의 혜택을 누렸으므로 그 편의성을 알고 있다.
그런데 또 안 되는 곳에 살게 되면 적응하는 법이다. 이것이 원래 속도. 주 7일 택배도 필요 없다. '원래 속도'도 충분히 빠르다. 나는 내가 너그러웠으면 한다. 너그러워야 하는 곳에 살기로 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