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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선물은 가격택이 없다.

[양평 사람 최승선 024] 이곳의 선물은 쉽고, 무겁다.

by 최승선

양평으로 이사를 오고, 좋아하던 책방에서 워크숍을 진행한 일이 있다. 6주 동안 같은 멤버들이 진행한 워크숍의 마지막 시간이어서 나도 얼떨결에 선물을 받게 됐다. ‘내가 양평에 왔구나’ 느끼며 너무 감동받은,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 선물은 말린 계수나무 잎이었다.


선물을 주신 분께서는 본인도 누군가에게 받았던 선물이었다고 하셨다. 말린 계수나무 잎을 선물로 받았는데, 달고나 같은 냄새가 나서 블라인드에 걸어놓으니 오랫동안 기분이 좋았다고. 그러고 보니 집 마당에 계수나무가 있어 잎을 줍고, 씻고, 말려, 포장해서 선물로 주게 되었다고 하셨다. 집 앞에 있던 거니 부담 갖지 말라고.


보통 선물의 가격택은 떼서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일 텐데, 받은 만큼 줘야 하는 한국에서는 그 가치를 가늠하길 멈출 수가 없다. 공산품이라면 그 가격을 찾는 일도 쉬울 뿐더러, 찾지 않아도 대충 가격 범위를 유추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선물을 준비하면서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줄까, 말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카카오 선물하기’ 시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나는 영 아닌 것들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심심할 때마다 선물함의 위시리스트를 채워둔다. 몇 천 원부터 십만 원을 넘는 것들까지 다양한 가격대로, 같은 품목도 다양한 종류로 구비해 둔다. 선물 주는 사람이 고를 선택지를 남겨두는 나름의 배려다.


‘적정 가격대’에서 ‘적정 성의‘를 표현하려는 사람들의, 선물을 위한 선물 고민을 줄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고민을 하느라 스크롤을 내리는 게 너무 피로해서, 누군가의 위시리스트에서 몇 번의 터치로 뚝딱 기억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으니까 상대방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시골에선 다른 것이다.


’위시리스트‘라는 건 통하지 않는다. 집에서 과잉 생산 된 것들을 나눈다. 어떤 ’과잉‘은 의도된 ’과잉‘이다. 애초에 정해지지 않은 누군가에게 주고야 말겠다는 이미 정한 확고한 마음으로 과잉 생산한 것들. 한국인의 영혼인 김치부터 시작해서 각종 채소, 과일청, 반찬, 어제는 당근 라페까지. ’좋아하세요?‘를 물으며 이미 포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그랬다. 우리 집은 배 과수원이었는데, 분명 배만 키웠는데 각종 과일이 그치지 않았다. 누구도 마트에 가서 과일을 사 오지 않는데, 과일이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커서야 그 과일들은 모종의 거래였음을 알았다. 우리 가족들은 배와 배즙, 밭에서 자란 이것저것, 그리고 뚝딱뚝딱 노동력을 제공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게 각자의 것들을 제공했다.


우리가 선물한 ’ 배‘는 박스 단위로 책정된 가격이 있었으나, 받는 사람들은 그것들은 몇 만 원으로 환산하지 못했다. 직접 길러온 농부의 손으로 전해진 과일은 마트 바구니 위에 있는 과일과 달랐다. 이건 내가 마트에서 과일을 사 먹게 된 후에야 느낄 수 있는 마음이었다. 직접 기른 복숭아를 선물 받으려 찾아가면 어떤 때는 집 앞 마트에서 사는 게 에너지가 덜 들까 싶지만 마음이 달랐다. 그 복숭아와 이 복숭아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지점이 요리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는 시골 사람으로서는 참 난감한 일이긴 하다. 배추김치를 받았으면 깍두기라도 돌려줘야 하는데, 배를 받았으면 참외라도 돌려줘야 하는데 나는 황송한 마음만 안고 어쩌질 못한다. 여름이면 할아버지가 키운 블루베리를 홀랑 받아다가, 할아버지의 땀을 앞세워 보은 하고자 하지만 이게 웬 불효인가 생각하면 마음이 또 뒤숭숭하다.


나는 무엇으로 이웃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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