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난할 운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양평 사람 최승선 025] 내 마음은 콩밭, 내 입맛도 콩밥

by 최승선

휴학을 하고, 처음으로 주 40시간 근무한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꿈을 이뤘다. 내 꿈은 부자였고, 그건 월 200이면 될 것 같았다. 힘들다는 친구에게 치킨 한 마리쯤 고민 없이 보내주는 정도면, 내 인생 돈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21살 때 이야기다.


나는 '용돈 없는 청소년'이었다. 비정기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때에 이따금씩 '만 원'을 받았다. 버스비가 없어서 처음 보는 할머니가 버스비를 내준 적도 있었고, 학창 시절 간식은 거의 친구들이 사줬다. 잔돈을 저금통에 모으면, 이제 모은 그 돈을 털어 버스비로 써야 했다. 19살 때 빌린 5만 원을 21살이 되어서야 갚을 수 있을 만큼 난 늘 여윳돈이 없었다.


그 탓에, 나의 기획도 늘 가난했다. 소위 '문화기획'이라 불리는 기획들, 행사나 커뮤니티나 워크숍을 포함한 그런 기획들을 프리미엄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나는 겨우 청소년기와 청년 초기를 지나왔으므로 그들에게 마음을 쓰는데, 나는 그때 회비 5천 원 때문에 포기한 행사들이 많았으므로.


그렇지만, 직업으로 기획자를 택한 사람은 그렇게만 살 순 없다. 0원짜리 기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100억짜리 기획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통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독립기획을 하다가, 작은 사회적 기업에서 수의계약 범위의 용역에서의 기획을 하다가, 대학원에 가니 건축을 포함한 기획을 해보면서 마주한 장벽이었다.


나는 가난한 소비만 상상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양평 친구들과 만약에 게임을 시작해 봤다. "만약에 갑자기 1,000만 원이 생겼고 10분 안에 써야 해. 못 쓰면 돈을 물어내야 돼. 뭘 살래?" 몇 개의 생활 가전을 빠르게 갈아치우고, 상상 속 장바구니를 분주하게 채웠으나 맘처럼 쉽지 않아 급박한 게임이었다.


몇 달 뒤, 내가 평소에 갈 일 없는 의류 편집샵과 백화점을 가게 되었다. 안목을 기를 겸 쫄래쫄래 따라가서 괜찮은 옷들의 가격 택을 보며 그때 그 게임, 10분 안에 천만 원을 쓰는 일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알았다. 쉬운 게임이 아니라 아쉬운 게임이었다.


대학원 막학기를 앞두니 향후 진로를 묻는 사람들이 생긴다. 차마 대학원 밖 사람들과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글쎄요. 석사 백수가 되겠죠'하고 말지만, 대학원 사람들과는 조금 더 심도 있는 대화를 해본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학과의 석사를 받아, 나는 무엇을 하게 될지.


연봉 올리는 게 목표인 삶은 살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안분지족'의 삶을 살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때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숫자로 평가받고 싶진 않지만, 숫자로 평가해도 '커리어 하이' 하나쯤은 품고 싶은데.


지자체 용역을 받아서는 월 300의 벽을 못 넘어갈 것 같고, 자체 콘텐츠 창작과 문화기획으로는 회사 생활과 병행하길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은데. 40대, 50대에 어떤 업으로 월 500은 벌어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월 천 벌어본 후기' 같은 릴스들에 홀랑홀랑 넘어가고나 있다.


누구나 쉽게 상상하듯 '부자에게 돈 벌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봉사하기'를 언제나 꿈꿔보지만 부자들의 삶이 나아지는 데 크게 관심 없는 사람은 동태눈이 될 뿐이다. 내 마음은 콩밭인데, 강남으로 가려니 그 길이 너무 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골의 선물은 가격택이 없다.